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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Jul 28. 2023

복수하는 여자

마들렌, 더 브라이드, 문동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계획했던 복수는 자기 파괴였다. 십 대 초반,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자아와 그 자아로 불안정하게 바라본 '나'라는 비극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 나와 가장 빈번하게 부딪힌 사람은 당연히 훈육을 담당했던 엄마였고 그가 미워서 어쩔 줄 몰랐던 나는 복수를 계획했다.


그러나 복수할 능력도, 배포도 없는 주제라서 내가 죽으면 엄마가 고통스러울 거라는 빈약한 아이디어만 겨우 떠올렸다. 그러고 나서 한 일은 빨간색 펜으로 유서를 한 자씩 눌러쓴 게 고작이었다. '엄마가 밉고 엄마 때문에 고통받다가 자살합니다.' 거칠 것 없이 중2병을 호되게 앓던 내가 계획했던 복수다.


오랜만에, 잊었던 복수를 다시 떠올렸다. '연진아'라고 부르며 그리움과 증오 사이 어디쯤에서 편지를 쓰는, 모든 것이 불타고 복수심만 남은 여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였다.


나는 언제나 복수하는 여자의 편이고 그들을 좋아한다. 세상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려지고 죄인을 단죄하고자 복수를 감행하는 여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여성인 나에게 가해지던 억압이 가장 거셌던 시기엔 더욱 그랬다. 그 시절 접했던 복수하는 여자의 서사는 크나큰 쾌감과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영화 <애꾸라 불린 여자> 마들렌 역의 크리스티나 린드버그



가장 좋아했던 복수극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크게 성공한 여성 주연의 복수극이다. 영화를 전공한 지인이 내가 이 영화에 열광하는 걸 알고는 <애꾸라 불린 여자>를 추천했다.


타란티노는 <킬 빌>에서도 어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설정, 캐릭터, 명장면을 다양하게 혼합하고 오마주하는데 <애꾸라 불린 여자>는 <킬 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키도(우마 서먼)와 대적하는 애꾸눈의 엘 드라이버(데릴 해나)도 이 영화에서 차용한 캐릭터다.


그런데 영화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B급 영화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초저예산 싸구려 영화인 데다가 심지어 포르노였다. 일단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강간당한 충격으로 실어증에 빠진 탓에 주연 배우가 러닝 타임 내내 대사 한 줄 없이 침묵 속에서 연기한다. 설상가상으로 주인공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납치, 강간, 성매매, 마약 중독, 한쪽 눈 실명 등의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자신을 학대한 남자들을 찾아가 복수를 시작한다.


<킬 빌>의 화려한 액션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연기라고는 도통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연 배우가 작고 마른 몸으로 액션을 엉성하게 소화하고 묘기에 가까운 운전을 선보인다. 전개도 음악도 기괴하다. 전반적으로 당황스럽고 불쾌한 영화인데 그 와중에도 이상하게 비장미가 흐른다. 또 몇몇 장면은 복수와 폭력의 대가인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연상케 할 정도로 독특하다.


알고 보니 이런 류의 영화는 70년대부터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였고 <애꾸라 불린 여자>는 그 가운데 수작으로 이름난 영화였다. 강간당하고 악당을 상대로 복수하는 여자의 서사가 일종의 장르였던 셈이다. 특히 남성 창작자들이 짓밟히고 복수하는 여자를 좋아했다. 복수하는 여자의 서사가 복수하는 남자의 그것보다 훨씬 극적이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우선 여성이 주인공인 복수극에서는 복수의 동기부터가 자극적이고 한정적이다. 여성이 사람을 죽이거나 그와 비등한 행위를 죄책감 없이 행하자면 확실한 당위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보통 정절의 유린, 육체의 학대, 혹은 육체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자식의 죽음, 세 가지 사건 내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여성의 가장 큰 자산은 몸이고 몸이 훼손된 여성은 못 할 짓이 없다'는 발상에서 출발하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남성 주인공이 부모, 혹은 스승의 죽음이나 가문의 몰락을 계기로 각성하고 힘을 키워서 초인이 되는 설정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한마디로 여성 복수극은 주인공이 학대당하는 과정, 복수를 결심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전부 여성혐오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그런 만큼 극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은 이러한 자극을 좋아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 문동은 역의 송혜교ⓒ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도 불의 이미지와 동은의 흉터를 강조하며 복수의 동기가 마치 몸의 훼손인 것처럼 연출한다. 그러나 어린 동은이 감내한 신체적, 정신적인 폭력은 훨씬 더 악랄하고 복잡하며 심각하다. 우리 사회의 병폐인 학교폭력이 드라마로 다뤄진 적이 없는 데다가 또 흥행 작가 김은숙의 흡입력 있는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력이 만나 드라마는 엄청난 화제와 관심을 끌어냈다.


그런데 <더 글로리>에는 복수의 주체인 동은이 마지막까지 완전무결한 존재로 남음으로써 복수를 행하는 인물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성의 추락과 그로 인한 딜레마가 빠져있다. 그 점이 너무 아쉬웠다.


<애꾸라 불린 여자>에도 윤리적인 딜레마가 있느냐고 반문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싸구려 영화는 주인공이 직접 망나니 칼춤을 신명 나게 추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주인공은 남자들을 죽이는 복수를, 야근으로 밀린 일을 처리하는 사람처럼 묵묵하게 해낸다. 말 그대로 '용서는 없다'.


<더 글로리>도 초반부에 동은이 '추락할 너를 위해, 타락할 나를 위해'라고 거듭 말함으로써, 동은은 복수를 행하다가 어디까지 타락하고 또 그 윤리적인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대신 복수의 판을 짜고 가해자 연대를 부수며 악인들이 서로 물어뜯게 한다. 이러한 결말도 그 나름대로 통쾌하긴 하나 허전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촬영과 녹음이라는 극적 장치가 번번이 긴장감을 떨어뜨렸고 비록 영광은 없을지라도 주인공이 오롯이 가져야 할 복수의 희열도 이리저리 흩어졌다. 동은의 바람대로 그들을 더 뜨겁게 응징했다면 좋았을 텐데.


옛말에 '복수를 하려거든 묫자리부터 서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복수라는 건 극단적이다. 가해자를 응징하는 데서 산뜻하게 끝나는 복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수를 불행의 구렁텅이까지 끌고 가서 같이 빠져 죽는, 그야말로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식의 처절함이 아니라면 복수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 옛날 딴에는 처절했던 내가 복수할 능력도, 배포도 없음에도 시늉이라도 하고 싶어서 자기 파괴를 떠올렸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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