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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Mar 14. 2023

안녕, 이글루스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던 2013년의 내가 머물던 둥지와 작별하기

  어딘가에는 뭔가를 적어두고 싶지만, 누군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일기장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면 노트북부터 펼쳐서 대화를 기록하고, 틈틈이 드는 생각을 메모한다.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인상적인 장면이나 대사가 나오면 노트북 또는 스마트폰부터 집어든다. 누군가는 나에게 병적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좋은 습관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반응 또는 평가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적어도 무엇인가 적어내는 것은 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기 때문에 시작된 습관이기도 하니까.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던 것은 2013년이었다.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졌고, 대학원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시기였다. 대학원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진로에 관한 고민도 생겼다. 20대에는 적어도 연애, 학업, 진로 중 하나는 번듯하게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20대는 그렇지 못했다. 서른을 향하던 나의 20대 후반부는 조급했다. 위태롭던 나를 지켜보던 지인의 권유로 시작했던 게 블로그였다. 무엇이든 적어내면(당시 용어로는 배설하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정착하게 된 게 바로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서비스였다. 네이버는 너무 상업적이거나 오픈된 느낌이었고, 티스토리는 당시에 초대장으로만 가입이 가능한 폐쇄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선택의 여지가 많지는 않았다. 마침 당시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친애하는 작가, 디자이너들이 이글루스에서 블로그를 운영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매일 하나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읽던 책, 듣던 음악, 찾았던 전시나 공연에 관한 리뷰를 남겼다.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일화를 적기도 했고, 일주일 동안 남겼던 메모들을 갈무리해 아카이브 하기도 했다. 온라인에서 교류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 중 누군가와는 비밀댓글을 주고받았고, 만나서 식사를 하기도 했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그중 누군가를 몰래 흠모하기도 했다(물론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치열했던 2013년이었다. 300개의 글을 썼고,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해 글을 읽어주었다. 블로그에 적은 글 덕분에 좋은 회사에 스카우트가 되었고, 창업까지 하게 됐다. 당시에 적었던 글을 보여주었던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때의 글, 관계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이듬해부터 글을 쓰는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일을 시작했다는 게 가장 그럴싸한 핑계였다. 적당히 행복했고, 적당히 바빴다. 적당함보다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나보다는 남을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쩌면 나를 기꺼이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음이 진짜 이유였을지 모르겠다. 마침 이웃들도 하나, 둘 이글루스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3년의 나를 이글루스에 봉인하게 됐다.


  이글루스를 다시 시작한 건 지난해 겨울이었다. 뭔가를 적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0년 전처럼 매일 나를 들여다 보고, 나에 관한 글들을 적기 시작했다. 아직은 온전하게 정착하지 못한 삶과 마음, 커리어가 주제였다. 어려웠다. 사람들 앞에서는 당당(해야)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의 모난 부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겨우내 모난 부분을 다듬고, 따뜻한 봄이 되면 둥글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2023년 6월 16일부로 서비스가 종료되는 이글루스


  그런데 어제 이글루스의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댓글을 살펴보니 '올 것이 오고 말았다'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이 많은 글들을 어떻게 백업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착하지 못한 글들을 어딘가로 안전하게 이사 보내야 했다. 10년 전처럼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금방 이사갈 플랫폼을 결정하고 하나, 둘씩 글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글루스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이걸 빌미로 연락을 드렸다. 이참에 이글루스에 한 번 들어가 보겠다는 답장들이 이어졌다.


  행복해지기 위해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어느새 내 삶은 나를 증명하는 과제의 연속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10년 동안 내 커리어는 극적으로 변한 것이 없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지칠 여유도 없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에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상처받을 여유도 없었다. 지난겨울부터 지금까지 이글루스에 머물며 나를 들여다봤던 것은 분명 잘한 일이다. 그리고 잘한 일이 될 것이다. 마치 10년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틈을 냈고, 시간을 내서 여유라는 것을 가져보았으니 말이다.


  여전히 나의 삶과 마음, 커리어는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는 흔들리거나 흘러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후련하게 작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던 2013년의 내가 머물던, 이루고 싶은 꿈만 꾸는 2023년의 내가 머물던 작은 공간, 이글루스와의 작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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