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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17. 2022

네모난 칸에 갇힌 사람들

옛날에 유명한 중역이 있었다.

보고를 올릴 때마다 형식에 맞지 않는다고 ‘다시!’를 몇 번이고 외치는 바람에 그 팀은 야근하기로 유명했다. 

어제의 중역이 말한 대로 양식을 수정한 뒤 보고하면 어제의 본인이 말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맘에 들지 않는다며 핀잔을 늘어놓는다. 몇 번의 수정 끝에 겨우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데, 중역은 해당 제품의 흔한 단위조차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셨다.     


예전보다 시스템이 나아졌다.

입사 초기만 해도 프린트를 한 후 위에 결재 칸 도장을 찍는다. 그 후 작성자에 내 서명을 하고 결재권자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긴급히 승인이 필요할 때, 졀재권자가 부재중이어서 발을 동동 구른 적이 몇 번 있었다.

변경된 시스템은 기안을 올리면 결재체계에 따라 다음 결재자에게 바로 메일 알림이 가서 메일로 연동된 기안 시스템에서 승인을 누를 수 있다. 

   

처음 전자 기안이 도입되었을 때,

내 눈에는 정확하게 줄을 맞췄으나 기안 상신 버튼을 누르면 시스템 오류로 모든 줄이 삐뚤삐뚤하게 자동으로 변경되어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팀장이 기안을 보자마자 나를 불렀고 기안을 인쇄해서 종이로 가져오라고 했다. 팀장은 30cm 자를 대고 ‘찌익~’ 그으시며 기안에 띄어쓰기가 맞지 않다고 다시 해서 올리라고 하셨다.

나름 시스템 오류라고 변명해 봤지만, 팀장이 기본도 모른다는 식의 눈치에 그날 오후 내내 띄어쓰기 한번 하고 기안 올려서 줄이 어느 위치에 갔는지 확인하고 다시 기안 내려서 띄어쓰기를 다시 하며 번거롭게 기안을 작성했다. 나는 억지로 시스템으로 구현할 수 없는 줄 맞추기를 인위적으로 끝냈다.     

최대의 문제점은 전자 기안 시스템에 테이블 삽입 기능이 되지 않다는 점이다. 글로 풀어서 작성하려고 했으나, 윗분들이 파악하기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고자료를 따로 만들어서 첨부파일에 올려야만 했다.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경영진 보고는 PPT로 따로 작성한다. 정해진 템플릿과 규격이 있고 색상도 회색과 남색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다 보니 다채롭게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어렵다.

     

윗분들에게 한눈에 알기 쉽게 설명하느라 모든 것을 틀에 맞추어서 표현하려는 습관에 길들여져서,

딱딱하고 맹목적인 되어버린 나의 문맥에서 내 시각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생각하기보단

네모난 칸에 갇혀서 윗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내 생각을 말하고 주장도 해봤지만,

부정적인 피드백이 쌓여 갈수록 어느 순간부터 나도 말수를 줄이게 된다.


오히려 나의 의지와 생각을 가질수록 피곤하고 괴로워진다는 걸 안 순간부터 

그저, 근무시간 내에 하라는 것만 하고 있다.


마치, 길쭉한 정사각형 종이로 출퇴근을 표시하던 기계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찌직찌직~’ 

    

출퇴근 시간표가 찍히는 소리, 그 소리가 이젠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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