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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ug 23. 2023

나의 취향

사원 2년 차, 두 번째로 만난 팀장님은 나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었다.

부장 된 지 10년 차이자 중역을 앞둔, 한 직장에서 경력 30년을 바라보고 계셨다. 회사 내에서는 늘 화려한 넥타이와 넥타이핀으로 유명하셨다.    

  

그 당시 나는 영업팀에 있었는데,

말수가 적은 나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멋쟁이 팀장님의 취향을 쫓아서 주말에 등산을 따라갔다.


어느 날, 외국 유학 경험도 있으신, 4개 언어를 하시는 여자 대리가 경력직으로 우리 팀에 입사하셨다.   

   

두 분은 약간 톰과 제리인 것처럼,

말장난을 자주 하셨는데,

팀장님은 뭘 먹고 싶은지 인사치레 물으시면,

나는 항상 팀장님 드시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예의상 대답했으나,

여자 대리는 그 나이에 남자 팀장님들이 싫어하실만한 음식을 정확히 먹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따라 팀장님은 여자 대리가 말한 음식이 드시고 싶지 않으셨는지 눈치가 없다고 다른 남자 과장에게 구시렁거리면서 속삭이는 것을 나는 엿들었다.     


소극적인 나는 팀장님의 장난스러운 그 모습에도 내 의견을 내는 것을 주저했다.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윗사람의 취향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

나는 늘 타인의 의견에 동조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지 않은 척 살아내는 것에 익숙했다.     


회사 생활에서 남의 눈치를 살피고 취향을 아끼는 것이 무던하게 살아남는 방법에 도움을 주었지만, 친구들 간의 관계에서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떠넘기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이 흘리던,

무더운 여름날 두 개의 음식점 앞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중,

언제나처럼 ‘아무거나 좋아! 너 먹고 싶은 곳으로 가자!’라고 외치자, 친한 친구가 갑자기 정색하며 ‘우리 그냥 집으로 가자.’라고 말했다.

내 입장에서는 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이 행복한 일이어서 친구의 선택을 존중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으나,

늘 언제나 ‘아무거나’를 외치는 나를 대신해 친구가 음식 메뉴를 고민하여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적당한 음식을 찾아주는 것이 친구로서는 부담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나의 취향을 친구에게 떠밀지 말고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취향의 범위를 좁혀야 선택하기 쉽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남을 위한 행위라는 명목으로

무차별적으로 ‘아무거나’라는 공격을 한 것이다.     


스스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취향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부먹파인지, 찍먹파인지,

구운 치킨을 좋아하는지, 튀긴 치킨을 좋아하는지,

달리기가 좋은지, 걷는 게 좋은지,

달콤한 향을 좋아하는지, 쌉싸래한 향을 좋아하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나라는 사람의 취향을 정의 내릴 줄 알아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명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나의 취향을 발견해야 한다.    

 

주저하지 말고 새로운 맛에도, 새로운 운동에도, 새로운 방식 등에도 도전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도 모른 채

말하기 귀찮고 구태여 설명하기 어려워서

남의 취향대로 살면

결국 나는 어딘가 표류한 채 스스로 정의를 잃고 말 것이다.     


나는 어떤 취향의 사람인가?

나는 오늘도 스스로 되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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