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티처의 잡생각
91년 5월 스무하루. 날씨: 맑음
나는 꿈꾸며 산다.
인생이 꿈같았으면 하는 마음,
모든 사람의 마음일까.
‘시국선언 지지 서명’
나같이 사회에 무관심한 아이가 서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분신자살한 사진을 신문에서 본 충격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무엇에 서명했는지를 교장실에 불려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회라는 것, 우리나라의 현실, 우리나라 교육계가 이토록 쪼잔한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교장, 교감, 교무주임의 눈초리가 따갑기 시작한다.
나는 그저 나 스스로 내 주위부터 무언가 변화시켜 나가려고 할 뿐인데..
91년 5월 24일 금요일 날씨: 비 오고 흐릿함.
아침 등교 시작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학부모들에게 유인물이 배포되어서 시국 서명 교사들을 좌경, 용공으로 매도하고 있다고.
학부모들은 누구의 연락을 받았는지 학교로 몰려들었다.
교장실에는 시국선언 교사 8명의 생년월일, 주소, 가족관계, 전공과 발령 시기 등이 나와 있는 것과 00선생님의 글쓰기 지도에 관한 유인물에 이상한 글을 적은 복사지와 신문 등이 학부모들 손에 들려져 있었다.
이런 교사들 밑에서 어떻게 학생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겠느냐, 전학을 보내겠다는 말들이 들려왔다.
마지막에는 다섯까지 조항을 내걸고 수락하지 않으면 학생들 등교 거부를 시키겠다고 말했다.
정말 서러움이 눈 앞을 가렸다.
어떻게 학부모들이 교사를 그렇게 모욕할 수 있으며 같은 교사가 다른 교사를 그토록 한꺼번에 매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현실은 영화나 만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내가 직접 겪다니..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안절부절못했던 내 마음을 확고하게 정할 수 있었다.
그래. 끝까지 밀고 나가보자.
하는 데까지 꿋꿋이 버텨보리라.
결코 흔들림 없이.
사회가 이런 곳이었구나.
사람 목소리가 그립다.
91년 5월 27일 화요일, 날씨: 맑음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이어질지 모르는 우리들의 밤의 역사가 하루하루 그 깊이를 더해간다.
나 같은 아이가 왜 그곳까지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단순가담자인지도 모를 나를 주동자처럼 몰아넣은 이는 누구인가?
교육을 주관한다는 윗대가리들과 그 하수인들인가. 너무나도 엄청난 음모가 꾸며져 있다는 것이 하나씩 드러날수록 우리의 분노는 깊어만 간다.
이쪽과 저쪽이 하나둘 명백히 갈라지고 눈덩이가 불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싸움은 커져만 가고 있다.
어느 길로 내닫고 있는지 모른다.
그냥 내가 도와야 한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기필코 이겨야 한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드는 학부모를 달래야만 한다.
91년 5월 30일 목요일. 날씨: 흐림
슬프다.
오늘 너무나도 많이 울었다. 지금도 울고 있고 눈이 떠지질 않는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이 답답함을 어떻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체육대회를 마치고 우리 반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리의 문제에만 열중한 나머지 아이들이 겪는 갈등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때문에 눈치 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누가 이들을 이토록 울부짖게 했는지.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아이들을 위한 일인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정말.
오후에 우리를 지지하는 선생님과 대책 회의가 열렸다.
참 긍정적이고 용기가 되었다.
하지만 가정방문은 헛수고였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번 생긴 고정관념은 바꿔 놓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학부모들이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까.
너무 답답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정말 이 현실이 뼈저리게 슬프다.
91년 5월의 마지막 날 금요일 날씨: 맑음
8시가 넘도록 푹 잤다. 얼굴이 텅텅 부어있었다.
남원에 가서 우리의 서명 용지와 남원 소식을 돌리고 온 선생님들은 체육대회장이 떠들썩했다고 했다.
장학사가 쫓아오고 긴 시간 이야기를 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대화를 가장한 설득만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 선생님들은 세 명씩 짝을 지어 가정방문을 했다.
학부모들의 오해를 풀어 드리고 진정서에 대한 서명을 받았다.
학부모들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우리의 파면을 동의하는 데 도장을 찍었고 이장이 자기 맘대로 서명한 지역도 많았다.
어느 학부모는 그런지 몰랐다고 교장과 교감을 내쫓아야 한다고 했고 어떤 학부모는 학부모 총회를 열어 이 일을 반드시 해명해야 한다고 했다.
내일도 우리는 계속 투쟁해야 한다.
91년 6월 2일 주일. 날씨: 흐리다가 맑다가 이슬비가 옴.
지금 학교에 도 장학관이 나왔다고 한다.
00선생님이 상황설명을 해주었지만, 그 말을 다 믿기 어려웠다.
그동안 불신의 싹이 텄기에.
학교에 선생님들이 많이 모여 계셨다.
00 장학사님도 뵙고, 이야기는 생가보다 긍정적이진 않았지만 통이 큰 분이니 조금은 잘 진전되리라는 기대가 엿보였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지난 토요일에 우리 반 아이들이 모의고사 답안지를 백지로 냈다.
사랑하는 여덟 분의 선생님을 보낼 수 없다고 칠판에 써놓고.
아이들이 한 번씩 행동할 때마다 꽤 큰 충격을 받고 있는데 백지 사건까지 겪고 보니 정말 충격이 컸다.
괜히 그런 행동을 한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아이들이 그런 행동까지 할 맘을 먹었을까.
아이들로 인해 충격을 받을 때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어쨌든 버티는 것이 힘이 든다.
91년 6월 4일 화요일 날씨: 맑음
정말 머리가 터질듯하다.
지금까지 가둬 온 나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해 버릴듯하다.
아무도 징계받지 않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일이 마무리되었다.
아이들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여기서 합의해야 하는가.
정말 실망스럽다.
정말 이로써 해결이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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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의 일기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일기를.
무얼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모르겠다. 희망을 꿈꾸기에 슬픔이 너무 크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고통은 변화의 산파였다.”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