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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27. 2022

무덤의 언덕 스레브레니차

D+12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레브레니차

    하얀 비석이 온 시야를 가득 메운다. 다른 경우라면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법한 초록의 언덕. 그러나 아무리 눈을 돌려보아도 가득히 늘어선 흰색 비석과 작은 봉분을 피할 길이 없다. 마주 보기로 한다.


    1995년 7월, 세르비아계 군인들은 이곳에서 7일 동안 8천372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을 살해했다. '청소'되어 버려진 이들의 무덤이 언덕을 이뤄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다. 이 흰색 언덕의 이름은 스레브레니차(Srebrenica)다.



    발칸 반도의 조그마한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와 있다. 1차 세계대전의 발원지인 사라예보가 여기에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설명하자면, 20세기 말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이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는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라는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종교도 이슬람, 가톨릭, 정교회로 각각 달랐다. 그러던 중 고르바초프가 사임하고 냉전이 종식됐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해체의 길을 걸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본국과 분리되기 싫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의 후원을 받아 스릅스카 공화국을 '건국'하겠다고 선포한다. 이어 민병대를 꾸려 보스니아계가 거주하던 지역을 침공한다. 크로아티아 또한 크로아티아계 주민 보호를 이유로 보스니아계 지역을 침공한다. 실상은 혼란을 틈탄 땅따먹기였다. 이들은 단순한 전쟁을 넘어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보스니아계 민간인을 학살했다. 4년 가까이 지속된 이 전쟁의 희생자 중 80%가 보스니아계 무슬림이었다.


    스레브레니차는 UN 평화유지군이 안전구역으로 선포한 피난처였다. 보스니아계 피난민들은 죽음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 왔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이곳마저 침공했고, 허울뿐이던 소수의 UN군은 항복했다. 도망쳐온 보스니아계 남성과 소년들은 이곳에서 모두 살해되고, United Nothing이라는 원망 어린 낙서만 벽에 남았다. 당시 파병되었던 평화유지군 군인들은 학살에 대한 일부 책임이 인정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스레브레니차 인근 건물에 사진들이 전시돼있었다.


    나는 94년에 태어났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95년에 벌어졌다. 머리를 한대 쥐어맞은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이 학살 앞에서,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역사'라는 표지를 붙이며 도망갈 수가 없다.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사유로 하여금 환멸이나 무기력이 아닌 전진을 빚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발길을 가득 채운 흰 비석 사이를 걸었다. 아무리 걸어도 비석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뿐이라서, 답이 없는 슬픔과 한탄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어려웠다. 묘지의 끝자락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흰 묘석들이 어지러울 정도로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눈을 흐리게 뜨면 흐드러지게 핀 데이지 꽃밭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스레브레니차는 세르비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경계에 있다. 180㎞밖에 안 되는 꽤 가까운 거리다. 주변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로 향했다.


    발칸의 역사를 훑다 보면 세르비아는 참 사랑하기 어려운 나라다. 그래도 이곳에 온 이유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통령 브로즈 티토의 묘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베오그라드 '유고슬라비아 박물관'에는 오로지 티토와 관련된 전시물밖에 없는데, 다 둘러보고 나면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흰 대리석 회랑을 만나게 된다. 그 한가운데 그의 무덤이 있다.


유고슬라비아 박물관


    세르비아인들은 그를 사랑한다. 세르비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비록 독재자였을지언정) 이 피비린내 나는 다민족-다종교 국가를 하나로 규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크로아티아 태생이기에 크로아티아계가 손해 보는 결정을 내리고, 세르비아계의 힘이 커지자 수도를 사라예보로 옮기려고까지 하며 균형을 추구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에 저항하는 파르티잔을 이끌었고, 냉전의 한가운데선 비동맹주의를 외쳤다. 박물관을 산책하며 그의 생애를 훑었다.


    티토를 만나고 나오는 길, 시내의 한 서점에 놓여 있던 책이 시선을 빼앗았다. 제목은 '발칸의 아우슈비츠', 부제는 '잔악한 우스타샤 제국'.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파시즘 정당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 2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인 약 4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슷한 사례로 보스니아계 '한트샤르'도 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유고 내전 때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학살한 데에는 이에 대한 보복의 심리도 있었다고들 한다. 그러니까 이건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들춰내고 싶은 이야기.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있었다.


'발칸의 아우슈비츠'


    크로아티아부터 세르비아까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났던 분쟁의 흔적을 좇아 여행했다. 이 흔적들을 읽는 일은 마치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피해만 얘기한다. 크로아티아는 우스타샤를 말하지 않는다. 세르비아는 발칸 전쟁의 전쟁범죄에 대해 마지못해 사과했지만 억울하다. 그러니 반성과 치유는커녕, 민족적-종교적 갈등을 동원해 전쟁무기로 사용했던 세력에 대한 비판도 어렵다. '평화'라는 단어는 한 획도 그어지지 않았다.


    예상보다 발칸에 오래 머무른 이유는, 이 모든 게 발칸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것들의 공존이라는 큰 관점에서 보면, 어쩌면 이곳은 인류의 난제를 모아둔 문제집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티토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이 반도에서 잠깐의 평화라도 만들 수 있었는지. 천장에 뚫린 커다란 창을 따라 볕이 티토의 관 위로 내리쬐고 있었고, 당연히도 그는 대답이 없었다.


티토의 묘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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