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2, 그리스 메테오라
세르비아에서 불가리아를 거쳐 남하, 그리스에 도착했다. 솅겐 조약에 따라 체류할 수 있는 최대 기한을 맞추기 위해 계산해보니, 그리스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남짓. 그동안 맨 아래 크레타섬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터키로 빠져나가야 한다. 꽤 바쁜 일정이지만, 러시아에서 장거리 운전을 하도 많이 한 탓인지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스에서의 강행군을 위해 솅겐 조약이 적용되지 않는 불가리아에서 충분히 체력도 비축했다.
그리스의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그 유명한 메테오라(Meteora)에 들렀다. 사실은 갈 길이 바빠서 그냥 패싱 할까 고민하기도 했고, 꼬불꼬불 길을 운전하느라 피곤하기도 했는데 웬걸. 날씨가 눈부시게 화창해서 정말이지 환상적인 풍경을 마주했다. 한가득 펼쳐진 돌기둥과 바위 절벽, 주변을 둘러싼 초록의 숲과 파란 하늘, 그 가운데 드문드문 보이는 작은 수도원들. 신을 만나러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 옛 수도사들의 고행이 금세 머릿속에 그려졌다. 여행사에서 "메테오라 같은 곳은 메테오라밖에 없다"라고 광고하더니, 진짜였네. 흔치 않게 광고 문구보다 탁월한 현실을 만났다.
수천만 년 전 이곳은 원래 호수였다고 한다. 물줄기가 실어 나른 각종 퇴적물이 쌓이고 쌓인 후, 호수가 말라 사라지고 지반이 융기하면서 퇴적물은 세상을 만났다. 그리고 저마다의 함량에 따라 비바람에 다른 속도로 깎여 나가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됐다. 그리고 약 천년 전, 신을 만나려면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믿었던 수도사들이 이곳에 모여 생활하기 시작하며 땅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메테오라. '공중에 매달린(suspended in the air)'이라는 뜻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많은 마찰과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같은 풍파에도 누군가는 견뎌내고 누군가는 마모된다. 메테오라와 같이 비바람을 견딜 만큼 충분히 단단한 녀석들은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외롭게나마 서있을 수 있다. 그만큼 강하지 못해 부서진 것들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도, 수도원을 지키는 교인들도 누구 하나 흩어진 잔해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세상의 거칠음이야 네 잘못이 아니지만 견뎌내고 살아남는 건 너의 몫이라는 걸까. 삶이 그런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왠지 수천만 년을 견딘 바위산이라거나 신을 만나기 위해 높은 곳에 매달린 수도사들, 또 그들이 세운 고고한 수도원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이 갔다. 흩어지고 스러져 이제는 형체도 남지 않은 연약한 이들. 먼지처럼 사라진 사람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높은 산봉우리가 아닌 보통의 우리들 곁에서 가장 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한다. 그래서 신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래로, 더 아래로,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도록 그곳에 거했으면 한다.
천년 전부터 이어져온 수도원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시계를 더 돌려, 2천 년 전 신의 말씀을 전했던 신탁의 도시 델포이에 도착했다.
나는 델포이가 실존하는 도시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읽었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무수한 영웅들이 신탁을 받았던 곳. 상상 속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델포이가 실제로 존재했고, 여전히 신탁이 내려지던 아폴로 신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무척이나 설레었다. 운전대를 꽉 쥐고 속력을 내 델포이로 달음박질쳤다. 엄마의 손을 끌고 서점에서 다음 편을 구입하던 그때처럼.
밤늦게 도착한 델포이의 첫인상은 꽤 당황스러웠다. 이름과 역사에 걸맞은 고즈넉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밤늦게까지 펍에서 흘러나오는 클럽 음악에 쉽게 잠에 들기도 어려웠다. 각종 기념품 상점과 비싼 음식점이 즐비한, 너무나도 현대적이고 전형적인 관광지였다. 현대의 델포이는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 신의 가호를 받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악 소리에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날 델포이 신전을 올랐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산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건너편의 산자락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아랫 세상이 다 보이니 신의 말씀을, 운명을 안다고 자신했을 법하구나. 신탁을 내려주던 아폴로 신전은 꽤 많이 무너졌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당대의 풍경을 그려보기 충분했다. 고고학 박물관에 가면 사제 '피티아'가 앉아 신탁을 내려주던 청동솥을 볼 수 있다.
'델포이의'라는 뜻의 영단어 'Delphic'은 '수수께끼 같은, 모호한'이라는 뜻도 갖고 있다. 델포이의 신탁이 워낙 애매하고 뜻을 알기 어려웠던 데서 비롯됐다. 낭만적으로 해석하면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왜, 하나님의 계시도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고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가.
반대로 조금 비정하게 해석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모호한 말로 신뢰는 획득하면서 도망칠 곳은 남겨두었던 거지. 그런 의미로서의 델포이의 신탁은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았다.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놓고 흐릿한 경계에서 생존하는 수완. 현대판 피티아로 이름 붙일 수 있을 몇몇 인물들이 떠오른다. 진실을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2천500년 전과 조금이나마 달라진 점일까.
체험학습을 온 학생들과 관광객으로 북적여 시간여행을 하기엔 조금 소란스러웠던 델포이 신전을 빠져나와 근처의 다른 신전으로 갔다. 델포이 신전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이 앞서 머물렀다는 아르테미스 신전. 아무도 없는 이곳에 오니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생전 처음 본 올리브나무와 그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 무너진 신전의 구석에 홀로 앉아 2천500년 전 이 땅에서 펼쳐졌을 신화 속 세계로 다시 들어가 보려 애썼다. 각자의 개성을 뽐내던 사고뭉치 신들의 시대는 옛날에 끝났다. 지금은 고고하고 도덕적인 유일신이 지배하는 시대다. 그러나 저 멀리 산 중턱을 지나 바다로 내려가는 태양의 한편에는, 오래전 잊힌 신이 끄는 낡은 태양 마차가 여전히 매달려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깎여나가 사라져 버린 옛 신의 그림자가 노을 사이로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