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6 그리스 크레타섬
군대에 있을 때였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 허덕이고 있었을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알아보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 있다는 그의 비문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자유가 무엇인지 이렇게 간명하고 강렬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크레타 섬은 그가 나고 자라 평생을 사랑했던 공간이다. 동시에 주인공 '나'가 조르바와 함께 먹고, 춤추고, 일하고, 시를 쓰던 무대. 그 모양과 향취가 궁금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에 대해서도. 그러니 여행을 준비하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크레타가 항상 최남단의 목적지로 찍혀 있을 이유는 충분했다.
델포이를 지나 아테네에 도착, 파르테논 신전 등 유명한 유적지들을 며칠 구경했다. 아테네에서 크레타까지는 배로 10시간 정도 걸리는데, 나는 시간이 부족했다. 머리를 쥐어짠 끝에 나이트 페리를 타고 새벽에 들어와 하루 동안 섬을 여행하다, 같은 날 다시 배를 타고 나가는 방법으로 겨우 하루를 만들었다. 다행히 차를 배에 태울 수 있어 섬 내에서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좁은 도미토리 객실의 침대에 몸을 구겨 넣고 맥주 한 캔과 함께 '그리스인 조르바' 영화를 봤다. 긴 러닝타임이 지나고 잠깐 눈을 붙였을까, 선원들이 방마다 돌아다니며 일어나라고 외쳐대는 소리에 아침을 맞았다. 드디어 크레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장대비가 쏟아진다. 비는 곧 천둥번개와 우박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미노스 문명의 파이스토스 유적지에 들어갔다가, 번개 맞을까 봐 걱정해주는 친절한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로 피신해야 했다. 실제로 그런 사고가 꽤 있는지, 그들은 괜찮다고 말하는 나를 한사코 말렸다. 다이달로스가 지었고, 미노타우르스를 가뒀다고 전해지는 미궁이 발견된 크노소스 유적은 아예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모두 포기하고 카잔차키스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이마저도 계속 정전이 되어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온종일 즐거웠다. '환상적인 날씨지?'라며 박물관 직원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소설 속 조르바와 주인공 '나'가 처음 만나는 항구의 날씨도 딱 이렇게 모든 것을 적셨다. 소설의 정취를 느끼러 왔다면 최고의 날씨 중 하나인 걸지도. 게다가 그들이 전재산을 쏟은 사업이 깡그리 망한 날 저녁, 둘은 통쾌하게 웃으며 바닷가에서 춤을 춘다. '나'는 그때 비로소 스스로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그 마음의 한 조각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고작 일정 몇 개 어그러진 게 뭐가 대수일까.
마지막으로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잠깐 비가 멈춰 본래의 목적은 이룰 수 있었다. 크레타 섬과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 위 그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 교단의 부패를 비판했기 때문에 교회에 묻히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자유로운 사람에게, 좁은 교회보단 이 넓은 크레타섬의 언덕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뿌릴 소주는 없어 가만히 서서 묵념을 했다. '이 먼 곳까지, 당신을 만나러 왔어.'
오래전 친한 형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현재의 삶을 더 이어가게끔 해주는 것이 우리가 어떤 존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냐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카잔차키스의 글이 내게는 그런 의미였다. 그러니 여기까지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고대했던 카잔차키스를 만나고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는 길, 비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이층 침대에서도 나는 온통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