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37, 그리스 코린트
크레타에서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로 돌아왔다. 아침 6시.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차를 몰아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향했다. 첫 목적지는 코린트. 한국에선 고린도로 더 유명하다.
코린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잇는 길목에 있어 크게 번성했던 도시로, 각종 이야기에 단골로 등장한다. 오이디푸스가 입양되어 왕자가 된 곳이 이곳 코린트였다. 사도 바울이 코린트의 교회와 주고받은 서신은 신약 성경의 고린도서가 되었다. 서양 고대사에서 결정적 순간 중 하나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직접 당사자 또한 코린트였다. 마지막으로, 신을 농락한 죄로 영원히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시시포스)가 바로 코린트의 건국 왕이다.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코린트를 잠깐 둘러보고, 시지프가 형벌을 받았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아크로 코린토스 산에 올랐다.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카뮈를 꼽는다. 태양이 눈부셔 한 남자를 살해한 죄로 기소되지만, 결국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는 '이방인' 속 부조리의 세계. 그런 부조리의 문제에 대한 카뮈의 철학적 논고가 '시지프 신화'다. 그 첫 문장. "참으로 진지한 문제는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카뮈는 묻는다. 근원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에서 시지프의(인간의) 삶이 살 가치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삶이 온통 부조리와 고통이어서 가치가 없다면) 자살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닌가? 카뮈의 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고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인간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과 운명의 전유에서 답을 찾았다. 그러면서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말한다. 아크로 코린토스의 정상에 도착했다. 카뮈를 읽으며 한 뼘씩 겨우 견디던 때를 떠올렸다. 어느새 그로부터 참 멀리 떠나왔다. 시간도, 공간도, 마음도. 이젠 다 괜찮아졌다.
공부를 하다 문득 억울했던 순간이 있었다. 세상의 많은 지식들이 왜 나에겐 활자로만 전해져야 하는지. 유럽의 청년들은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나는 다른 이의 요약과 전언으로만 알 수 있는 게 답답했다. 그래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으로 보고,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고 싶었다. 세계의 관전자로만 남고 싶지는 않아서.
북유럽에서 내려온 뒤로는 바라던 대로 역사의 현장에 직접 서보는 여행을 했다. 베를린과 바르샤바, 아우슈비츠에서 만난 냉전과 홀로코스트. 나치와 소련에 연속으로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와 헝가리. 발칸의 나라들을 여행하며 마주친 생생한 내전의 흔적. 이념이, 종교가, 민족이, 때로는 과학까지도 명분이 되었던 살해와 파괴.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했을까, 순진한 질문을 던져보았고 역시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저 희생자들의 사진 속 얼굴들만 멍하니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스에선 고대의 문명을 만났다. 미케네 문명과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 델포이 속 신정의 세계와 아테네의 민주정. 그리고 그 후예들의 오늘날 모습까지. 그렇게 현대에서 고대까지,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다. 뭔가 알게 되면 명쾌해질 것 같았는데, 알면 알수록 복잡해질 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선생이 자신의 무지를 알라고 했나. 그래도 직접 봤으니, 이제 판단할 시간이다.
어딘가의 무덤에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고 한다. "나의 과거는 너의 현재이고, 나의 현재는 너의 미래이다." 고작 해골바가지 주제에 오만하기는. 그러나 우리가 20세기의 유럽인보다 결코 현명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피해야 할 과거의 선택지를 몇 개 더 쥐고 있을 뿐.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지프'의 뜻은 아직도 잘 모르겠고 짙은 현기증이 머리를 아프게 하지만, 베를린의 평화의 방과 스레브레니차의 무덤들 앞에서 몇 가지 다짐은 얻어갈 수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근처의 미케네에 들러 아가멤논의 왕궁 터를 둘러보고, 그리스 최대 와인 산지 네메아에 들러 와인을 몇 병 산 후 다시 그리스 북부로 차를 돌렸다. 6시에 네메아를 떠나 그리스 가장 위쪽의 도시 테살로니키에 도착한 게 밤 11시. 이날만 735㎞를 운전했다. 운전 거리만큼이나 길고 긴 하루였다. 내일이면 오랜만에 국경을 넘는다. 유럽을 잠시 떠나 터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