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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30. 2022

한 해의 끝, 여행의 끝

D+184, 포르투갈 호카곶

    오늘은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전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 3년 전부터 그려왔던 대륙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곶(Cabo da Roca). 동해항에서 처음 배를 타던 날부터 이날까지  이곳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 마지막에 이르니 왠지 도착하고 싶지 않아져 방에서 느적대며 몽니를 부렸다. 괜히 별 관심 없는 관광지에 들렀다 오후가 돼서야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차를 몰았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터벅터벅 언덕을 걸어 올랐다. 호카곶에는 한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려고 기다리는 이들로 북적댔다. 사람들은 이곳이 대륙의 최서단임을 알리는 십자가 기념비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 뒤편으로 대서양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음유시인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난간에 몸을 기댔다. 사람들이 재잘대는 소리, 흥겨운 음악 소리, 밀려오는 파도 소리. 가만히 마음을 맡겼다.



    눈물이 났다. 이유 모를 눈물이 자꾸 나서,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바다만 쳐다봤다.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는 오지 못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어떤 날에는 잔뜩 지친 마음에 하늘을 날아서라도 이곳에 이르러 여행을 끝내고 싶었다. 다른 날에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처럼, 유목민으로 남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닿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돌아가고 싶었고,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머무르고 싶었고, 떠나고 싶었다. 함께 있고 싶었고, 혼자가 되기를 바랐고, 강하게 붙들려 있으면서도 자유로이 유랑하고 싶었다. 이토록 모순되는 감정에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마다 고요히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 3만 4천 킬로미터를 달려왔다.


    온갖 시간들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득히 멀리의 지평선을 좇아 달리던 러시아. 알렉산드리치를 처음 만나 베개 밑에 가위를 쥐고 자던 날부터 안녕을 말하던 순간까지. 도원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북유럽. 그 호수와 순록의 눈망울. 역사의 쓰린 흔적을 따라갔던 독일부터 그리스까지의 여정, 텅 빈 초상 속의 시선들. 새로운 발견이 가득했던 정겨운 터키, 정비소에서 얻어먹었던 따스한 밥 한 끼. 그리고 온통 지친 몸을 이끌고 부득불 달려온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이곳 호카곶까지. 그 순간들이 계속해서 고개를 쳐들고 위로를 건네 왔다. 참 좋았다거나, 고생이 많았다거나. 춥지만 행복했다거나, 괜찮지 않았던 순간들도 사실은 괜찮았다거나.



    무슨 거대한 도전을 이뤄낸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도망쳐왔을 뿐이다. 삶은 이래야 한다는, 너는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소음을 견디다 못해 스위치를 껐다.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중력에 매달려 공전하던 것을 멈추고 궤도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이곳까지 왔다.


    그간 여행을 함께해준 조심이와 사진을 남기고, 이곳을 기억할 작은 기념품을 샀다. 마드리드로 돌아가 부산으로 향하는 화물선에 배를 태우면 조심이와는 잠시 안녕이다. 그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나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좀 더 하다 돌아갈 예정이다.


    호카곶의 기념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여기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여행은 끝났다. 돌아가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유목을 끝낸 유목민은 도태되지 않고 정주할 수 있을까. 처음 도망쳐올 때 그랬듯 결말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도둑질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것처럼, 나는 언제든 또 도망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고, 함께하고, 머무르는 것을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야. 여전히 삶은 기워지고 기울어졌지만 그 모습이 이제는 썩 밉게 느껴지지 않는다.


    빛나는 시절이었다.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이 시절, 정말로 잊지 않을 수 있기를.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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