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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30. 2022

에필로그:
낭만적 여행과 그 후의 일상

길었던 여행을 마치고

    얼룩덜룩, 미처 지우지 못한 차창의 땟자국 너머로 끝없는 하늘이 달려 나간다. 사방의 어딜 둘러봐도 인간이 만든 것 따윈 없다. 수십 년은 자랐을 거대한 나무가 손가락 한마디보다도 작게 보인다. 거대한 화물차가 점점 가까워진다. 속도를 줄여 뒤에 바싹 따라붙었다가, 마주오는 차가 없는지 살피곤 속도를 확 올려 추월한다. 처음엔 엄두도 못 냈지만, 나중엔 너무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됐던 러시아식 추월. 여행은 끝났지만, 블랙박스 영상 속에서 나는 여전히 질주 중이다. 가끔씩 꺼내보는 유목의 삶.


    별이 빛나는 러시아의 숲 속,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핀란드 호숫가의 아침, 춤을 추던 오로라와 기웃대던 순록들. 정상에 올라 빙하를 내려다보며 홀짝이던 믹스 커피. 낯선 이들로부터 대접받았던 한 끼의 식사. 아우슈비츠의 새파랬던 하늘, 아테네 신전의 열주 틈새로 비치던 노을. 호카곶의 마지막 울먹임까지. 나는 온종일 그것들을 그리워한다. 사진이나 더 찍어둘걸, 내 기억력을 너무 과신했나 봐.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해변

    정확히 1년 전 오늘, 긴 여행을 떠났다. 7개월의 유랑을 마치고 지난겨울에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엔 일종의 후유증을 앓았다. 분명 똑같은 내 방인데 왜 이리 답답한지. 매일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 맞이하는 아침은 왜 이리 지루한지. 자극과 열망이 사라진 빈자리는 원인 모를 울적함의 차지가 됐다. 그럴 때마다 남몰래 기도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대륙을 달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익숙함의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달을 허투루 보낸 다음이었나. 잊어야지, 했다. 어차피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현실에 발을 디딜 시간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를 짧게 잘랐다. 차에 붙였던 영문 번호판도 모두 떼어냈다. 미뤄뒀던 진로 고민을 끝냈다.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학원도 등록하고, 스터디도 꾸렸다. 9년째 다니던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등록했다. 꽤 바쁜 시간들을 보냈고, 여행은 다시 과거의 추억이 됐다.


러시아의 숲 속


    가열찬 무언가를 끝내고 나면, 으레 그런 질문을 받는다. '무엇을 배웠니.' 대답을 알지 못해 멋쩍은 웃음으로 넘기기 일쑤였다. 아니 사실은, 영영 대답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보람이나 의미로 치환하는 순간,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을 망가뜨릴 것 같아서.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었고, 나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래서 달리는 내내 자유로웠다. 오랜 시간 그런 삶을 원했고, 판타지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머릿속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거면 됐다.


    이젠 다시 증명의 세계로 돌아왔다. 입사를 하려면 각종 꾸밈말로 가상의 나를 만들어내야 한다. 정주민의 삶이다. 뭐, 그런대로 잘 적응하고 있다. 매일의 모험 같은 건 없지만, 매일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새로운 여행지 대신 익숙한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인다. 나날이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진 못하지만, 대신 어제의 성실함이 쌓이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아직 여운이 남아서 가끔은 내달리고 싶은 충동에 어지러울 때도 있지만 그런대로 괜찮다. 여행하던 때의 낭만과 열기도, 머무르는 지금의 정겨움과 안정감도 모두 내 것이다.


    나는 여행에 대해 자주 말하지 않는다. 말을 한마디 꺼낼 때마다, 그 순간을 언어화할 때마다 무언가에 가두는 것만 같아서. 그리울 때면 사진을 꺼내 보거나, 한적한 자유로를 달린다. 그럴 때면 다시 끝이 없던 그 도로로 돌아간 것만 같다. 여행을 함께 다녀온 조심이는 연식에 비해 차체가 많이 떨린다. 한국에 돌아와 수리를 했지만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다. 동승자들은 꽤 불편한 모양이지만, 나는 멈출듯 멈추지 않는 이 진동이 밉지 않다. 깔끔히 닦인 차창 건너 익숙한 초록 배경에 한국말로 적힌 교통 표지판이 보인다국내 대기업이 개발한 내비게이션은 단속 카메라가 어디에 있는지, 목적지로 가려면 몇번째 차선에 서야 하는지까지 친절히 알려준다. 그때와는 다른, 너무 간편한 나들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수십번이고 차를 댔던 똑같은 구역에 쉽게 주차를 한다. 시동을 끈다.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방에 들어간다. 차문이 잠긴다. 헤드라이트가 꺼진다.


    2020년 6월 30일, 한국에서.


조심이를 떠나보내고 엄마와 갔던 이집트에서 찍은 사진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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