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달 Dec 13. 2022

에피-에필로그: 3년 전 여행을 쓴 이유


    그런 날이 있다. 적당한 시공간의 조화로 하늘은 어느 때보다 광활하고 햇살은 촘촘히 지상의 것들을 비추는 날. 그런 날은 땅 위의 모든  저마다의 색깔로 빛나는 것만 같다. 또는 하늘은 붉은빛, 구름은 분홍 빛으로 물드는 저녁놀의 축복이 있는 .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차창 너머를 향해 하루의 절반 가까이 질주하던 그때로 소환된다. 여행을 다녀온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날도 그런 하늘이었다. '생활고에 지쳐 키우던 딸을 버린 외국인 친모가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따위의 쉬운 문장으로 한 사람의 삶을 요약해버리고는 터덜대며 서초동의 골목길을 내려가던 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이 꼭 3년 전의 어느 날인가 봤던 것만 같았다. 그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현재와의 차이만큼 과거를 그리워한다는데, 그런 탓인지 그리움의 폭이 꽤 컸다.


    그립기만 하면 다행일 텐데. 때로는 이 여행의 기억이 나를 되려 울적함의 늪으로 끌고 내려간다고 느끼기도 했다. 핸들을 잡은 손, 엑셀러레이터 위에 올린 발로 내 경로를 선택할 수 있었던 그때와 지금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곳으로 가야 하지만 정할 권한을 소유하지는 못한 지금의 나는 스스로 과거의 유목을 그리워하는 정주민이 된 것만 같았다. 하릴없이 여행의 기록을 들여다보다 오랫동안 미뤄둔 일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여행 중에 떠오르는 것들을 자주 끄적였고, 하루 일과를 정리하며 인스타그램에 짧은 여행기를 게시하기도 했다. 당연히 한계는 있었고 나는 이 축복 같은 감각의 홍수를 무턱대고 담아내면서, '돌아가서 완성된 묶음으로 정리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채로 3년이 지났다. 매번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가 몇 문장 적지 못하고 노트북을 덮고 돌아섰다.


    서문을 쓰는데 3년이 걸렸다. 글의 시작 말을 쓰기가 가장 어려웠다. 서문이란 으레 그런 것이 아닌가. 글의 시작에는 별별 말을 늘어놓지만, 결국에는 이 여행이 '어떤 의미였노라' 정의하는 것. 나는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우당탕탕 '청춘'의 여행기로, 학업과 취업준비를 때려치우고 떠난 '일탈'로, 유별난 스펙이 될지 모를 '도전기'로, 그 어느 것 하나로 이 여행을 좁혀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몸을 배배 꼬았다. 지독히도 미뤄왔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다. 모두 정리되어 서서히 잊힐 완결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해 계속 소유해야 하는 미결로 남고 싶다는 의미다. 나도 그간 이 여행을 그렇게 미결로 두고 싶었나 보다. 정의해 정리한 뒤 '지나간 일'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휴대전화 속 여행 영상과 사진을 아직도 지우지 못했다. 별도의 저장장치에 백업은 해뒀지만 '글 쓸 때 필요하니까'라며 단 하나도 쉽게 지우지 못했다. 휴대전화의 저장 공간은 항상 99%쯤 가득 찬 상태였다. 어쩌면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나는 계속 여행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기적이게도 다시 현생을 살아갈 힘을 얻고 싶어, 이 여행을 정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알려졌다' '밝혀졌다' '조사됐다' 따위로 끝나는 문장을, 저녁에는 '느꼈다' '생각했다' '한 것 같았다'로 끝나는 문장을 썼다. 낮에 쓰는 글의 주어는 화려한 직함이 따라붙는 그들이었지만, 저녁에 쓰는 문장의 주어는 나였다. 좋았다. 그래서 눈을 비비면서 잠을 줄여가면서도 끝까지 쓸 수 있었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의 마감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하루가 멀다 하고 포털 메인을 장식할 뉴스가 나오는 출입처를 취재하느라, 숙취와 피로, 고루한 문장력과 다투느라 마지막에는 과거 썼던 글을 크게 손보지 못하고 올렸다. 그게 못내 아쉽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이별이란 있을 수 없으니 이정도로 떠나보내주는 것이 좋겠다.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여행기이고, 러시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꺼내기 쉽지 않은 시기라 출판에 이르기는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에 이야기로 남겨둘 수만 있어도, 그래서 가끔 스스로 꺼내볼 수 있다면 그런대로 만족스럽다.


    나는 계속 유랑 중이다. 그때는 세계를 돌아다녔다면, 지금은 사람과 사건 사이를 떠돈다. 그때는 자유를 구했고 지금은 진실을 좇는다. 언젠가는, 지금 하고 있는 두 번째 유랑에 대한 이야기도 이곳에 쓸 수 있다면 좋겠다.


(끝)

작가의 이전글 에필로그: 낭만적 여행과 그 후의 일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