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벌 김화숙 Mar 23. 2024

51세 아줌마의 일기장 훔쳐보기

내 삶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대던 2013년, 하프타임이 끝나가고 있었다


2013년 1월 8일 화


새해 한 주가 지나서야 수첩을 샀다. 지난해 퇴근 전철에서 글을 보니 수첩 크기가 아쉬웠다. 그동안 쓰던 세로 18센티 다이어리를 포기하고 세로 23센티 큰 걸로 샀다. 스프링까지 있어 무게가 확 다른데 아무래도 나중에 후회하지 싶다. 그러나 업무용에 일기 쓰기를 하려니 크기를 키워야 했다.


지난해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해결중심 상담' 공부였지 싶다. 사람을 섬긴다는 것에 대한 내 관점이 달라졌다. 대학시절부터 이날까지 나는 다른 사람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러나 전문 상담가가 아님은 물론, 사람 잡는 '선무당'이었음을 인정하게 됐다. 괴롭지만 선무당질은 그만할 수 있겠다.    



2월 20일 수     


두 아들만 2박 3일 제주도 여행 보냈다. 막내 15번째 생일 축하와 중학교 졸업 선물 이벤트에 군입대 앞둔 큰아들을 붙였다. 막내 몫 34만 원만 내가 댔다. 항공료 100,000, 숙박료 40,000에다 막내 이틀 치 쓸 돈 200,000원. 큰 놈 항공료와 숙박 및 잡비는 본인 용돈으로 쓰게 했다. 두 형제만 가는 첫 여행인데 두둑하게 노자를 다 주면 좋겠지만, 이게 돈 없는 숙덕 사는 방식인걸 워쪄.     


막내가 태어나서 비행기를 처음 타는 기회다. 덕은 적당히 무딘 사람이라 그게 뭐 큰일이냐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이들 성장 과정에서 그때그때 경험하고 느낄 기회를 못 가지는 게 결핍 아니겠나. 모든 걸 다 줄 순 없지만 기본적인 욕구의 충족은 중요하다고 본다. 감수성과 유머감각이 있고 순수하고 활기찬 아이에게 비행기를 못 태워준 게 늘 내 맘에 걸렸더랬다. 이벤트 응모가 안 돼서 과감히 돈 썼다. 잘한 결정이었다.          

 


2월 21일 목     


내 생일 기념으로 팀 사람들과 점심을 밖에서 먹었다. 팀장 제외 공무원 3명, 사회복지협의체 간사, 그리고 통합사례관리사 3명이었다. 낙지볶음+낙지 전+조개탕. 낙지볶음 4인분으로 7명이 나눠 먹고 전 2개와 조개탕 합쳐 52,000원 썼다. 생일자가 메뉴를 정하고 식비는 팀상조회비에서 냈다. 상조회비는 공무원은 한 달 2만 원, 사례관리사들과 간사는 1만 원. 지출은 주로 생일밥과 인사이동자 선물비로 쓰인다.    

  

“난 생일밥 못 먹었잖아. 그때 휴가 갔고 연초 너무 바빴고.” 박 주사가 밥 먹다 말고 진지하게 말했다. 윤달이라 생일 축하받기 어렵다고 들은 게 생각났다. “우리 밥 한 번 더 먹어요.”라며 이 사람 저 사람 거들고 심기를 살피다 생일 점심은 썰렁하게 끝났다. 밥만 먹고 허전하다며 새로 생긴 복지관 지하 커피집에 몰려갔다. 착한 가격이라며 13,500원어치를 마셨다.         


   

3월 5일 화      


심란한 3월 출발이었다. 그저께 덕과 주고받은 대화 여운으로 어제도 문자를 많이 주고받았다. 우리 가정에 새로운 구조조정 시작이었다. 큰아들은 군인, 딸은 대학생, 막내는 고등학생이 됐다. 돌볼 아이가 없어졌다. 4월부터 덕이 아는 사람과 노동하러 간다고 했다. 참 이상한 내 마음. 덕의 말을 듣는데 가슴이 알 수 없이 쿵 했다. 아, 이제 목사 남편이 투잡으로 돈을 벌러 나가는구나. 신나고 좋은 게 아니라 내 맘이 복잡했다. 생계형 직장 사모 구조 싫다, 대안을 찾자, 10년을 씨름했는데, 내가 입 밖으로 낸 첫마디는 복잡한 소리였다.     


“당신을 돈벌이로 내몬 거 같아 가슴이 철렁하네요.”


이게 뭐지? 나도 내 맘 모르겠는데 덕이 알아주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누운 채 반응이 없었다. 어려운 주제를 받으면 늘 하던 태도였다. 나는 기다렸고 결국 잠들었고 또 출근했다. 못다 한 대화는 낮에 문자로 이어졌다.   

   

숙: 어젯밤 당신 돈벌이 일하도록 내몬 기분이라 말했을 때 부정도 긍정도 안 하던데, 당신 생각 더 듣고 싶어.

덕: 당신이 나를 내몬 거 같은 느낌이라니 난 당황스러웠지. 그게 아닌데. 아내가 남편 돈 벌어오라 하는 게 잘못도 아닌데 당신이 그러면 내가 넘 무안하지.

숙: 살다 보니 무얼 해도 내가 떳떳하지 못한 내면인 거 같아요. 나도 속 안 보여주고 싶어지고 당신은 아내한테 말을 아낀다 소리 듣는 듯.

덕: 아이고 다행이다 단순하게 생각했지. 막돌 고딩 큰돌 군대, 이 타이밍에 감당할 만큼 하는거지. 속을 다 꺼내는 게 시원하면 그렇게 하겠지만.

숙: 알겠습니다! 남편 닦달하지 말고 알아서 해석하란 소리로 알겠습니다. 내 운명이고 팔자인 듯. 당신과 맘이 통하지 않으면 당신 일해도 내 맘은 또 불편할 듯. 손가락 빨아도 목사 남편 사명에 더 충실하도록 보호하고 내가 생계 맡는 게 욕 안 먹는 길이니까.


덕: 기대하고 좋아하기보다 나를 내몬 것 같아 철렁했다는 말에 당황했지. 너무 철저히 자기 점검하는 듯. 뭇 아지매들처럼 좋아하고 기대하는 게 우리가 살길 아닐까?

숙: 그러게. 나도 그런 기분이 들 줄 몰랐으니 어째요. 내 맘 표현한 게 실수? 그런 기분일 수 있구나 맘이 복잡하구나, 아내를 이해해보려 할 순 없고?

덕: 아니, 실수 아니고. 당신 맘이 그 정도구나 생각하다 방황해 버렸지.

숙: 그렇게 단순하면 왜 그렇게 미친년처럼 당신 괴롭혔으며 힘들어했을까.

덕: 그렇죠. 지극히 단순할 수도 있는데 단순하지 않죠. 내가 키웠으니까.


숙: 미자립 교회 목사 사모란 조선시대 선비 마누라하고 비슷. 이래저래 혼자 삭이도록 길들거든. 볶아도 대답 없는 메아리니까. 막상 돈 벌러 나간다니 부덕한 마누라 된 불편함이 덮치더라고.

덕: 부덕하다 당신 욕할 놈 없고. 당신은 조선여인 같을지 몰라도 난 선비같이 기고만장도 아니고. 혹시 C는 당신 욕할지도. ㅎㅎㅎㅎ 오랫동안 홀로 짐 지게 해서 미안하고. 복잡하고 섬세한 당신을 사랑해요.

숙: 이 한마디 듣자고 참 길게 했네. 휴~ 수백 번 들으면 그노무 사랑 조금 믿어질라나 몰라. 디립다 볶이는 덴 이골이 나서 별로 기분 꿀꿀하지 않겠죠 당신은.

덕: 늘 처음처럼 긴장 만땅이지. 도서관에서 책 좀 고르는 중.     


     

4월 30일 화     


4월 마지막 날. 오후 반차를 내서 서울 나들이했다. 중간고사 끝나도 과제와 팀플로 여유 없는 딸과 엄마의 봄꽃 캠퍼스 데이트였다. 2시 사무실 나와서 3시 신림역에서 교육 봉사 끝난 딸과 만나 학교로 갔다. 남녀공학과는 확실히 다른 싱그러운 여학생들만의 분위기가 좋았다. 딸을 여대로 민 건 생각할수록 잘한 일이었다. 내가 다시 대학 간다면 무조건 여대 갈 것이다. 캠퍼스 구석구석 쏘다니며 수다 떨고 셀카 찍고 죽치고 앉아 사람 구경하고 햇살도 맘껏 쬐었다. 학교 앞 그리스식당에서 저녁 먹고 엄마는 외계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또 쏘다녔다. 데이트 기념으로 딸에게 18,000원짜리 청바지 하나 검정바지 하나 사줬다.    

 

봄꽃 데이트 분위기 친정 엄마 전화로 깨졌다. 가성점액종으로 대학병원에 입원 중인 아버지 곁을 지키는 엄마였다. 병시중에 지쳐 딸에게 하소연했다. 늘그막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너그 아버지가 맘에 안 든다, 이런 레퍼토리였다. 여성은 늙도록 남편을 돌보다 지쳐가는구나 싶었다. 하지 말래도 안 하지도 못할 거면서. 엄마는 늘 앞뒤 안 맞는 소리만 했다. 저녁에 병원에 들를까 생각했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못된 문자 하나 보내 버렸다.

   

“어머닌 노년에 이 무슨 고생이고 싶다지만 두 분께 하늘 가는 준비로 복된 하루하루가 되기도 하죠. 두 분 마음에 은혜 주시길, 서로를 감사와 용서로 바라보며 주신 시간 잘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언젠간 우리 모두 홀로 가야 하는 길. 노년의 질병은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선물이 될 줄 믿습니다.”     


        

5월 6일 월      


“김샘 남편은 뭐 하는 분이세요?”     


시청 직원 10명과 함께 원주에서 1박 2일 교육 중이다. 저녁 식사 후 이 팀장이 내게 물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었지만 0.1초 고민하곤 내가 답했다.

“제 남편요? 음, 간단히 소개하면, 지지리 미자립 교회 목사예요.”  

하고 생각해도 깔끔한 대답이었다. 이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했다.

“어머 그래요? 미자립 교회면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익숙하게 듣는 ‘고생’이란 말. 예상한 반응에 예상한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그럼 성도가 몇 명이나 돼요? 애가 셋이니 정말 힘든 생활일 텐데…”

아니 어쩌라고,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 뭔데? 공감인지, 동정인지, 아리송해. 내가 씩씩하게 말했다.  

“맞아요. 고생 좀 하고 있겠죠? 성도요? 몇 명 안 된다고 하면 대답이 될까요?”

이 팀장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그렇군요. 저도 모태신앙이라 그래요. 교회 권사예요. 구역장이라서 목요일마다 구역을 섬기니 목요일에 교육 있으면 힘들어요. 주일학교 교사도 하니 주일엔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죠…”     

 

나는 살짝 놀라고 있었다. 내 귀에 교회 이야기가 너무 재미없어서였다. 교회에 충성하고 종교적 열심을 과시하는 사람 이야기는 정말이지 식상해 듣기 힘들었다. 그는 궁금하지도 않은 교회 자랑을 하다가 어느 주사님 아들이 목사라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목사 어머니답지 않은 행동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게, 그런 말 듣기 무서워서 내가 사모 아닌 척하지. 이제 날 두고 그럴 거잖아. 글쎄 김화숙 샘이 목사 사모였대. 세상에 목사 사모가 그렇게 행동해? 어머 어머 사모가 미쳤나 봐.



 8월 19일 월


"아프다고 사람 못살게 했다. 나를 못 살게 안 하나. 잡아먹을라 칸다."

퇴근해서 저녁 먹고 숨 돌리고 앉았는데 엄마 전화였다. 병원에 또 오셨단다. 78세 노구로 83세 남편을 수발한다는 게 얼마나 피곤하겠나. 평소 알콩달콩 살던 부부라면 몰라도 아픈 노부부는 지뢰밭을 걷는 나날인 것 같다. 부모가 자가발전 행복하게 살아주는 게 자식에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두 분은 아실까.


어깨와 뒷목, 허리 그리고 오른팔까지 점점 정상이 아니다. 무겁고 아프고 뻣뻣해서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들다. 내 몸 힘든 건 고스란히 내 몫이고, 노부모의 하소연도 내 몫이 된다. 한 주를 어떻게 근무할지 암담할 정도로 몸이 힘들다. 병원에 계신 부모를 찾아뵈어야 할 거 같지만 또 포기했다. 퇴근하기 무섭게 누워야 했다. 다행히 덕이 일 끝나고 문병하고 밤 12시가 돼서 집에 왔다. 참으로 시간 빈곤이다.



11월 11일 월     


어깨 목 팔이 계속 아파 병원을 다녔다. 글 쓰겠다고 나대던 열심을 잠시 접고 제법 쉬었다. 다이어리를 확인해 보니 9월 27일 이후 아무런 메모가 없는 백지뿐이었다. 일과 가정과 교회와 글쓰기에 늘 쫓기다 보니 몸과 맘이 왜 힘들지 않겠어. 버거운 걸 인정해 버린 건 해결중심 상담 공부 덕분이었다.     

 

U와 V가 대형교회에서 실망하고 다시 온 게 감사하다. 동생 부부도 함께 왔다. 그런데 이 작은 교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 안에 변화가 계속 일렁이는 게 보여서다. 이전처럼 사람을 붙들고 전전긍긍 돌보는 일에 나는 회의적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에 이젠 큰 의미를 안 두게 되었달까. 각자 자기 삶을 살도록 지켜보고 응원하는 정도가 내 일이지 싶다.      


나를 보라. 누군가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날수록 내가 자유로워지고 자라고 있지 않은가. 내 안에 믿음이, 그리고 예수의 영이 나를 이끌어가고 있다. 나를 인위적으로 가르치고 돕겠다는 사람은 사절이다. 우리 교회로 모이는 벗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도 결국 그런 거 같다. 스스로 찾고 누리는 자유!        


     

12월 30일 월     


결국 기간제 통합사례관리사 계약 만료로 퇴사가 결정됐다. 무기직 전환은 알고 보니 희망고문이었다. 담당 공무원 박 주사의 낯선 태도가 나를 더 기분 나쁘게 했다. 내가 너무 심기가 꼬였나 보다.     


: 샘 나중에 제가 와 달라면 오실 거죠? 같이 일하자고 손 내밀면 오실 거죠?

나: 모르죠. 날 버린 시청엘 내가 뭐가 좋다고 다시 와요.

: 그러지 마시고요. 삼고초려를 해서 다시 모셔야지.

나: 입에 발린 말 하지 마요.

: 샘은 정말 계속 같이 일했으면 좋겠는데. 상담 교수님도 그러셨잖아요. 해결중심 상담 그거 깨닫는 게 너무나 빠르다 하셨어요. 몇 년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대요.

나: 제가 말했잖아요. 사람들 섬기는 삶에 2% 부족하던 걸 해결중심 상담이 채워줬다고요. 사람들의 고통을 제가 다 짊어지고 느끼며 아파하는 삶에 한계를 절감했거든요. 해결중심 상담 첫 강의에서 아! 바로 이거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어요. 목회든 사례관리든 사람들을 보는 제 관점이 달라지는 계기였어요. 내가 책임지려 하지 않게 되었어요.

: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김화숙 선생님 놓치는 건 너무 아깝다며 실수하는 거라 했어요. 다시  신규로 기간제 뽑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요.

나: 그러게요. 저도 아주 기분 나빠요. 우리나라의 민낯이고 사회복지 현실인 걸 어째요. 기간제가 무언지 비정규직이 뭔지 차별이 뭔지 톡톡히 배웠어요. 눈을 뜨게 하는 수업료였나 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