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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Mar 11. 2019

살이 쪘고, 새 옷이 생겼다

세상 모든 체중 불어난 이들을 위한 위로


군살 하나 없이 쪽 곧은 몸으로 많은 이의 부러움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내게도. 

나잇살이니 스트레스 살이니 다이어트니 하는 단어들은 나와 먼 이야기였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날씬쟁이로 살게 되는 줄만 알았다. 불어나는 살을 어쩌지 못해 날마다 땀 흘려 운동하거나 저녁을 굶는 주변인들의 고달픈 일상도 딴 세상 이야기였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체중 변화가 없는 축복받은 유전자, 나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다. 회식 자리에선 내가 가장 많이 먹었고, 커피와 쿠키 등의 간식은 내가 늘 달고 살았고, 밤이고 낮이고 먹고 싶으면 망설임 없이 먹고살았다. 그래도 살찌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음껏 먹었다. 아무리 먹어도 1킬로도 늘지 않는 체중은 나의 자랑이었다. 


슬금슬금 찌기 시작했다. 두둑해진 옆구리살을 잡아보고는 놀라 급한 마음에 굶었다. 밤이 되면 허기져 결국 쥐새끼처럼 조몰락거리며 냉장고를 뒤져 고칼로리의 달달한 것들을 입에 넣고서야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배부터 나왔고 바로 이어 옆구리, 허리가 두툼해졌다. 어깨가 둥글어졌고 브래지어 끈 아래위로 등살도 불룩하게 잡혔다. 허벅지, 엉덩이도 든든해지고 팔뚝이 튼실해졌다. 욕실 거울에 비친 둥실한 내 모습이 보기 싫어 간헐적 단식이니 원푸드 다이어트 같은 것들을 검색했고 헬스장에 전화해 한 달에 얼마냐고 물었고 수영장에 전화해 레슨은 몇 시 타임이 좀 한가하냐고도 물었다. 살이 오르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속이 답답해진다. 


할 수 있는 건 제법 했다. 야식을 줄이려 노력했고 틈나는 대로 운동을 했고 밥 양도 줄여보았다. 쉽지 않았다. 자꾸 입이 심심하고 뱃속이 허전하고 마음까지 허해졌다. 세상 가장 싫어하는 운동을 매일 가려니 이보다 더한 노동이 없었다. 체중은 꿈쩍하지 않았고 체중조절과 함께 점점 서글퍼졌다. 무엇을 위해 살을 빼야하는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말이다. 


서글퍼진 건 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옷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같은 체중으로 살아온 때문에 옷들은 사이즈가 일정했다. 55 사이즈를 벗어나지 않았고 허리 치수는 27이면 넉넉하게 입었다. 슬금슬금 불어난 살이기에 그럭저럭 옷에 몸을 맞추며 꾸역꾸역 끼워 입고는 다녔는데 옷의 아래위로 남는 살들이 느껴지면 먹던 라면이 짜증스러운데 말할 수 없이 탐스럽게 보였다. 좀 날씬해 보일까 싶어 헐렁한 스타일의 옷을 입어봤더니 임산부 같아 보여 다시 붙는 옷을 입었더니 부담스럽다. 시간 많고 시력 좋은 누군가가 내 뒤에 앉아 터질 듯한 뒤태를 감상하며 속으로 낄낄댈 것 같아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남편의 옷을 주워 입기 시작한 건 고의가 아니었다. 남편은 체격이 좀 있는 편이라 잠옷으로 입어도 편치 않은 사이즈였다. 우리는 나이와 상황에 맞지 않게도 아주 가끔 커플티를 살 때가 있는데 아울렛 아디다스 매장에서 티 한 장에 15,000원 정도 특가 할인 중일 때 100 사이즈 한 장, 90 사이즈 한 장 이렇게 두 장에 3만 원이면 싸다 싸다 하면서 맘에도 없던 똑같은 커플티를 장만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빨래들 틈에서 바쁘게 집어 입은 아디다스 티셔츠, 품이 낙낙하고 스타일리시한 것이 얼핏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 마음에 들어 거울 앞에 이리저리 감상하고 있는데,


"내 티 못 봤어?"

"몰라"


남편이 묻는 말에는 찾거나 생각해보지 않고 무조건 모른다고 답한다. 그런 줄 알면서 늘상 묻는 게 신기하다. 난 정말 몰랐다. 본인 티를 왜 나한테 묻느냐며 타박도 했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새 옷을 입고 신이 나 아이라인 짙게 그리고 고데기로 머리를 말고 있는 내게 남편이 내민 건 '내 옷'이었다. 90 사이즈, 내 옷. 90 사이즈, 내 옷. 내가 입고 있던 건 100 사이즈, 남편 옷이었다. 


이 날부터 시작된 듯하다. 남편의 옷장을 힐끔거리기 시작한 건. 남편의 옷장엔 내가 좋아하는 아디다스 맨투맨 티셔츠들이 그득했다, 그것도 적당히 헐렁한 사이즈로 말이다. 등과 어깨가 답답해 보이는 내 옷을 입다가 남편 옷을 입으니 살 한 점 없는 왜소하고 날씬하고 사랑스럽고 보호본능 일으키는 보이룩을 걸친 여대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옷의 주인인 남편 말고는 아무도 남편 옷을 입은 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몸에 잘 맞았다. 남편의 티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면 주말 나들이 패션으로 훌륭했다. 후드티, 맨투맨티로 시작한 남편 옷은 그 지경을 점점 넓혀갔고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남편의 청색 셔츠와 스웨터도 한 번씩 등장했다. 겨울 잠바는 어떠한가. 두둑한 등살을 덮어줄 낙낙한 사이즈의 잠바들은 언제고 휙휙 걸치고 나가기 딱이었다. 내 옷장을 뒤지다 마땅치 않아지면 남편 옷장 앞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늘어갔다. 


살이 쪘고, 새 옷이 생겼다. 

옷값이 굳고 살림살이 좀 나아졌냐고? 

안타깝게도 나만큼이나 나잇살 붙어버린 남편은 그의 모든 스포티한 컬렉션들을 나에게 물려준 채 105, 혹은 110 사이즈 옷을 찾아 기웃거리며 본인의 옷장을 새로이 채우고 있다. 


100까지만이다, 라며 살찐 나에게 다짐을 받는다. 



이은경 Wri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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