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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눈 Mar 27. 2024

반야의 지혜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읽고 옮겨 적음


행복해지겠다며 목표로 삼고 있는 것 몇 개를 들어 생각해 보자. 

... 내 집을 가진다. ... 업적을 쌓아 될 수 있으면 정상에 오른다. ...


거의 모든 사람이 무의식 속에서 변함없이 '행복해지기 위한 목표', 

바꿔 말하면 '내게 만족감과 기쁨을 주리라 여겨지는 것'을 끝없이 좇아가는 삶을 삽니다. 

그 방식을 멈출 수 없습니다. 

붓다는 이런 상태를 '무명(무의식의 덩어리=무지=무자각)'이라 부르고, '괴로움'의 진짜 뿌리라고 말합니다.


화라는 감정은 방향이 바뀐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는 자신에게 불쾌한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충동에 지배당해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아닌 것'에 따라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는 고정된 무엇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요컨대 우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바뀝니다. '공'입니다.


시각적인 이미지-정보에 반응하는 것이지 물리적인 힘에 반응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정보에 조건 지어져 있지 물리적인 힘에 조건 지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깥에서 자신이 본 (그렇게 여기는) 것에 순간마다 반응하면서 (조건 지어져 있으며)

무자각하게 살고 있습니다. 본 (그렇게 여기는) 것, 들은 (그렇게 믿는) 것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런 신속함이 없으면 생물은 위험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비롯한 정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조금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틀림없이 실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이 그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상처 입는 것은 바깥(남)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참으로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남의 칭찬 따위를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바깥이 나를 받아들여 주면 나도 나를 받아들여 주겠다, 이렇게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깥 세계(남)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나'는 어떤 감정을 체험했는지, 

그 감정에 따라 어떤 반응을 취했는지 등을 알아가는 길 말고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나를 아는 길 말고는 감정이나 욕망에 몰리고 있는 나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한 '나'의 반응 방식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에 

반응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반야의 지혜'뿐입니다.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가치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있고,

스스로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깥 세계를 두려워하며 바깥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념. 바른 알아차림. 맑고 주의 깊은 마음을 이어 갖는 것. 자신의 생각과 행동 일체를 의식화하는 훈련.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날 때는 화의 '인'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인이 누군가의 말이라는 '연'에 따라 마치 꽃이 피듯 현실화하는 겁니다. 

만약 내 안에 '인'이 조금도 없다면 같은 말을 들어도 화가 일어날 리 없습니다.


바깥 세계로부터 오는 정보에 신체가 자동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신체 반응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정념 수련을 한 사람은 그 반응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한 반응을 하는 게 가능합니다. 

자신이 자유 의지로 행동했는지, 혹은 그 행동밖에 취할 수 없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행동밖에 취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행위의 씨앗이 기회를 얻어 꽃 피었을 뿐입니다. 


정정. 바른 마음의 통일. 지혜가 작동되도록 마음을 평온하고 통일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 명상.


수(감각 작용), 상(표상-이미지 작용), 행(마음 몸이 조건 지어지는 작용), 식(인식 작용).

정보가 '상'의 단계에서 '행'의 단계로 바뀌는 것을 막는 훈련이 '정정'입니다.

나날살이에서 우리에게 온 정보는 '상'에서 '행'으로 자동적으로 발전해 갑니다.

나날살이에서 잠깐 시간을 내어, 혹은 틈틈이 자신의 호흡에 의식의 빛을 쪼입니다. 

바깥 세계와 하나가 돼 있어서, 속박이 돼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모두 잃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자각합니다. 

호흡을 의식하는 것, 들고나는 숨에 의식을 두는 것만으로도 바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정념, 정정. 불교의 두 가지 훈련법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전혀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 '집착'하고 있을 뿐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신에 대한 태도와 남에 대한 태도는 하나입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렸을 때 비로소 남에 대한 집착도 버릴 수 있습니다. 

집착이란 자신의 요구에 꼼짝 못 하고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요구가 채워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갖고 싶어 하는 행위 자체가 불행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더 있어야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을 외워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믿음을 지워가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한 첫걸음입니다.


가테가테 파라가테 揭諦揭諦 波羅揭諦 

파라상가테 보디 스바하 波羅僧揭諦 菩提薩婆訶

가고, 가서, 저 언덕에 이른 자여.

깨달음이여. 경사로세!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야마나 테츠시 지음, 최성현 옮김,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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