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희 Jun 19. 2024

할머니, 나의 할머니

캐나다의 겨울은 여전히 길었다. 며칠 전 영상 23도를 웃도는 갑자기 찾아온 봄날씨에 어리둥절했다는 얘기가 무색할 정도로 눈과 바람이 뒤섞인 차가운 공기는 안 그래도 서린 마음을 세차게 휘감았다.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 시차 적응을 할 세도 없이 아침 일찍부터 친할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으로 갔다. 치매를 앓고 계셨던 할머니는 작년 연말 집 계단에서 넘어지시면서 뇌출혈이 오셨다. 이미 너무 많은 연세 때문에 병원에서는 수술이나 치료를 기대할 수 없다 했다. 의사소통과 인지능력뿐만 아니라 거동까지 불가능해지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모셔 오겠다는 아빠의 고집에 온 가족 모두가 나서 아빠를 설득한 끝에 집이 아닌 요양원으로 옮겨지셨다.


뉴스나 티비로만 들어 봤던 요양원을 직접 가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입구에서 호출 벨을 누르니 문을 열어주었다. 요양원에 대한 흉흉한 뉴스들도 많이 접했었기에 이런저런 걱정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곳의 첫인상은 밝고 따듯했다. 대저택 같기도 하고 앤티크 호텔 같기도 하고 유치원 같기도 했다. 3층에 위치한 할머니 방문 앞에 걸려있는 이름표를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는 휠체어에 앉아 계신 할머니가 창밖을 바라보고 계셨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할머니를 불렀다. 주름으로만 가득한 얼굴, 앙상해진 팔다리, 꼿꼿한 무표정. 할머니는 아무 대답 없이 나를 쳐다보셨다. 할머니 눈에는 아무런 힘도, 감정도, 목소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데, 색채를 잃어버린 할머니의 눈빛에서 나는 어떻게 그 마음을 읽어내야 할까.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할머니 앞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안함으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어머니, 어머니 손녀딸 왔어! 손녀딸 보니까 좋지?!” 재차 묻는 아빠의 질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셨다.

“에이, 싫다고 해도 고개 끄덕이시는 거 아니야?”

“어머니, 손녀딸 와서 싫어?” 또 고개를 끄덕이셨다.

“거봐 그냥 끄덕이시는 거야... “


올해 94세, 1930년생으로 백마의 해에 태어나 타고나길 하얗고 뽀얀 피부를 자랑하고, 우리 집에서 밥도 제일 많이 드시고, 목소리도 제일 크시고, 주 6일 일을 나가시고, 잠도 제일 잘 주무시는. 살면서 충치조차 있어 본 적이 없는, 본체 태어나시기를 천하무적인 분. 내가 어릴 적 할머니는 보험왕이셨고 당시 한국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일하셨다. 주말에는 산을 타시고 “쉬면 뭐 하나, 죽으면 어차피 평생 쉴 텐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실 정도로 강철 체력인 할머니와 나는 30년을 같이 살았다. 아니 정확히는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뜻은 엄마도, 결혼 첫날부터 지금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았다는 이야기다. 딸로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애(愛)와 증(憎)으로 혼란스러웠던 날들이 많았다. 새로 지은 밥, 새로 만든 반찬, 새로 끓인 국밖에 안 드시는 미운 할머니와, 처음 피아노를 배우는 손녀에게 턱 하고 피아노 한 대를 사주시는 멋쟁이 할머니. 매번 아빠 편에서 엄마를 외롭게 하는 할머니와, 나의 아린 배를 문질러주며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나긋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따듯한 할머니. 지난날들에서부터 떠밀려오는 양가감정 속, 그 정도면 살 만큼 사셨다는 주위의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실의에 빠진 아빠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아렸다.


“Good Morning!” 

요양원에서 할머니의 담당자는 필리핀계의 웃는 얼굴이 예쁜 여자였는데 방으로 들어와 아침 인사를 건네며 조식 시간임을 알렸다. 그녀는 휠체어를 밀어 할머니를 모시고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각 지정 테이블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다른 치매 할머니들과 같은 조가 되어 아침을 먹게 되어 있었다.

”이 테이블의 할머니들은 다 치매 환자이셔서 아무도 말을 안 해. 말도 좀 하고 그러면 좋을 텐데.”

“아빠, 어차피 할머니가 영어를 하실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이렇게 아무 말 안 하고 같이 먹는 게 더 편하실 거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할머니를 두고 아빠는 자꾸 자기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는 아빠를 귀찮아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조용히 좀 내버려 두길 바라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빠는 쉴 새 없이 할머니에게 말을 걸고 반응을 요구했다. 밥 먹는 곳까지 따라와 그러시는 아빠가 유난처럼 느껴지면서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가족들이 이렇게 매일 방문하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방문자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식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 밝게 웃고 계시는 한 할머니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옆으로는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떠난…”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빠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른 분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그새 또 바뀌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이곳에서 하루 건너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르는 할머니 사진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언젠가 우리 할머니의 사진과 이름이 걸리는 날이 올 거라는 것을.


방으로 돌아온 할머니에게 아빠는 물컹한 작은 공 하나를 건네셨다. 반사작용 운동을 위해 의사가 권유한 공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하셨지만 나중에는 한 손으로도 공을 척척 받아내셨다.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씩 풀리시더니 금세 웃고 계셨다.

“봐봐, 할머니 웃잖아~”

“할머니 기분이 좋아? 공놀이하니까 좋아?” 고개를 끄덕이셨다. 

싫다고 해도 또 끄덕이실 것 같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는데, 할머니는 내 손을 꽉 잡으시고는 놓지 않으셨다. 어찌나 악력이 세신지 손을 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안도했다. 눈으로 읽을 수 없었던 할머니의 마음을, 손으로 전달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와서 좋다고.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고. 잘 지냈냐고. 이제 아주 온 거냐고. 조금만 더 같이 있자고.


복잡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액자 속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사진 속에서 할머니는 아주 해맑게, 온전하게, 건강하게 웃고 계셨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생각과 함께 묽은 미움은 짙은 그리움으로 번졌다. 사진 넘어 창밖으로는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오는 노란 수선화가 보였다. 땅은 봄 채비로 한창이었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이, 창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햇빛 때문인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