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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희 Sep 27. 2024

어쩌면 (우리의) 아름다운 날들 1

제주 그리고 쉼

제주의 여름은 정직했다. 지구와 태양은 마치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는 듯, 아주 강열하게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장마전선이 몰고 오는 습기 때문에 숨이 턱 막히는 것도 같았지만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더위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친한 대학 후배와 함께하는 여행이었는데 계획된 것은 비행기 티켓과 숙소 그리고 추천받은 몇몇 맛집정도뿐이었다. 무계획 여행 같지만 중요한 것은 다 계획되어 있는 그런 여행.


여름에 제주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행여나 장마와 겹칠까 나름 7월 끝으로 잡았지만 여행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장마전선이 제주로 올라오고 있다는 뉴스가 슬슬 보도되기 시작했다. 날씨 때문에 고생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둘 중 한 명은 날씨 요정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가 와도 그 자체만으로 또 운치가 있겠지,
우리의 목표는 관광이 아니라 힐링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괜찮을 거야.


대학후배와 나는 서로를 도반이라 부른다. '함께 도를 닦는 벗'이라는 뜻으로,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후배 때문이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고자 캐나다에서 무작정 한국으로 왔을 때 후배는 내게 상담을 권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후배는 '나를 아는 일'에 그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다. 그녀는 내가 스스로 알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지금에 나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을 멈추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지금까지 내게 엄청난 힘과 위로가 돼준 똑똑한 후배이자 멋진 동생이자 좋은 벗. 그런 그녀와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함께한 3박 4일 동안 먹고, 쉬고, 대화하고를 반복하며 호흡이 비슷한 사람과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편안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무엇보다, 태어나서 나보다도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한 여름에도 솜이불을 덥고 잔다는 후배는 숙소 온도를 자꾸 28도로 맞춰놓아 애를 조금 먹긴 했지만) 영상 35도를 웃도는 제주 날씨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 뜨겁네"


숙소에 가기 전 지인에게 추천받은 소농로드라는 카페에 들렀다. 직접 기르는 당근들로 당근주스, 당근샤베트, 당근 케이크 등을 파는 곳이었다. 땅에서 나는 것들이 좋아진 요즘, 제주의 에메랄드 빛도 참 좋지만 최근에는 제주의 초록초록한 매력을 알아가는 중이다. 제주는 창을 내기 참 좋은 곳 같다. 어느 방향으로 창을 내어도 아름다워 그런가 보다.


구좌읍 소농로드



우리의 이번 여행 키워드는 '쉼'이었다. 바쁘게 돌아다닐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숙소였다. 평소 후배가 눈독 들이고 있었던 곳에 예약을 하게 됐는데 이곳은 정말이지 혼자만 알고 싶을 정도로(숙소사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완벽한 숙소였다.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었던 숙소의 청결 상태와 감각적인 인테리어에서 사장님의 치열하고도 끈질긴 고민과 정성이 느껴졌고, 창밖으로 보이는 제주의 초록뷰는 밤낮으로 무한 힐링을 선사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책도 읽고, LP도 듣고(하나 깨 먹었다), 고등어 회도 먹고, 술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아침도 먹고, 요가도 하고, 멍도 때리고, 꿀잠도 잤다. 더없이 충분한 곳에서 충분히 휴식을 즐겼다.  


녹음실 제주


유독 제주에서는 섬세한 손길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섬세함을 그리는 이도, 그 섬세함을 알아보는 이도, 한적함이 주는 여유로움 때문일까?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멀게 느껴졌던 감각들이 가까이 느껴지고, 갇혀있던 희망이 아주 작은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고. 시끄럽고 치열한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편안하게 내뱉고 편안하게 침묵할 수 있어 참 좋았다. 뭐든지 열심을 다하는 성격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 때도 있어 조금 내려놓고자 온 여행에서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몇 단계의 기초 화장품을 얼굴에 바르는 모습에 서로 웃음이 터져버린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뭐, 왜 웃었냐가 중요한가, 그냥 같이 웃는 게 즐거운 거지.


'가는곶 세화' 마당에서


"사회는 하나의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의 개념은 또한 장소의존적이다"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을 읽다 밑줄을 그어놓았던 문장이다. 사람의 개념이 장소의존적이라는 관점이 좋아 기록해 두었었다. 장소가 주는 힘은 엄청나다. 크게 보면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작게는 지금 있는 곳 반경 1M가 될 수도 있다. 공간의 이동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침실에서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는 순간에도 우리의 감정은 환기된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환기시키기 위해.


육지에서 섬으로, 낮은 돌담이 보이는 창밖으로, 예쁘고 맛나고 아늑한 것들을 내어주는 곳을 통해 다양한 순간들을 발견하며 우리 스스로를 더 깊게 발견하고 있었다. 제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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