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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May 18. 2024

SF가 알려주는 있을 법한 세상

<삼체> <미키 7> 등을 읽고

<삼체> 덕분에 때아닌 SF 삼매경에 빠져든지 한 달. 그동안 탐욕스럽게, 아니 게걸스럽게 읽었다. SF속 리얼리티를 의심하는 재미도 즐기고, 핍진성을 담보하는 저자의 유려한 기교에 감탄하고, 나아가 복잡하게 엉켜버린 고난과 역경의 서사를 어떻게 끝맺을지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삼체>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뒤이을 유니버셜급 SF대작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소설이 허황하지 않으며 독자의 상식에 뿌리내릴 수 있는 정도는 소재의 과학적 근거나 원리에 기반할 테다. 이미 장대한 시공간을 넘나들며 양자물리, 천체, 나노소재(나노섬유), 뇌과학(멘탈 스탬프) 등을 휘두르며 그 과학적 가능성을 놓치지 않은 <삼체>는 가히 SF논문급이 아닐까.

다만, 책 두께로 심리적 저항감을 높게 쌓은 탓도 있지만 양적으로도 S와 F 중 Science에 치중한 전개는 팬덤 확장에 태생적 한계가 예상된다.


무한한 우주에 지능을 갖춘 생명체가 인간뿐일 수는 없다. 보이저 1호가 골든레코드를 싣고 떠날 때, 분명 누군가는 우려했다. 인류보다 높은 지능과 기술력을 갖춘 외계인에게 인류의 정보를 노출시켜 그들로 하여금 침략의 원인을 제공한다면?

‘예원제’의 전파 송신을 받은 삼체인은 경고를 담아 회신했다.

‘대답하지 마라’ <삼체 1> p308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최소한의 인류애에 근거한 의인화가 아닐까.

삼체인으로서 나와 내 종족이 멸절될 운명인데, 유일한 희망 한 줄기를 내치며 외계인을 동정할 텐가?


양성자 컴퓨터인 ‘지자’ 두 개로 인해 과학기술이 무력화된 지구 속에서 과연 인류는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기대했던 영웅들 역시 결국 거대한 힘 앞에 인간으로서의 취약성을 드러낼 뿐, 그들 마음에 내재된 패배주의는 인류의 파멸을 최소화하거나 삼체인과의 공멸에 초점을 맞춘다.

면벽자의 거대한 계획과 파벽, 그리고 절망과 희망이 하나씩 교차하며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결국 모든 것은 미시세계요, 한낱 미물들의 꼼지락이었다.

우주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삼체도, 태양계도 종이 한 장 신세가 되고(2차원화), 더 이상 지구는 무의미하다. 우주는 10차원이지만 앞으로 차원의 감소와 우주 팽창은 자발적 방향이며, 죽음을 향하고 있다. 되살릴 수 있는가? 빅크런치! 결국 우주는 팽창과 수축의 순환론적 운명이다.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떠나며 남긴 지구 사진 ‘창백한 푸른 점’을 보며 칼 세이건은 인류에게 일갈했다. “정신 차리라!”

그러나 인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점점 광인이 되었다.

이런 인류에게 태양계를 멀찌감치 벗어나 ‘점’으로도 안 보인다며,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듯하다.

“오만하지 말라. 너희들은 (우주 속) 벌레다”


<미키 7>은 브래드 피트 제작, 봉준호 연출로 제작 중인 SF영화 <미키 17>의 원작으로, 마찬가지로 독자를 우주로 데려간다. <삼체>보다는 가볍다.

지구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디아스포라, 인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한다.

미키를 비롯한 개척단은 ‘니플하임’에 도착한다. 미키는 자신이 직접 실험체가 되어 위험한 역할에 투입되고 죽으면 바이오 재생하길 반복하는 ‘익스펜더블’이다. 한마디로, 테라포밍을 위한 인간 실험체다. 니플하임에는 이미 원주민 ‘크리퍼’가 살고 있다. 인류는 그들에게 외계인이다. 개체 중 대다수가 부속물일 뿐인 크리퍼에게 인간 하나하나의 주체성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나마 크리퍼는 우호적이지만, 크리퍼에게도 위협적인 또 다른 변종이 전쟁을 계획하는데…

미키의 역할을 통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테세우스의 배’ 비유를 든다. 죽기 전 미키와 재생된 미키는 같은 존재인가? 생물학적 연속성이 자아의 동일성과 같은 의미인지 고민케 한다.

둘째, 공존의 조건을 반문한다. 무력? 신뢰? 배척? 세 개의 종족은 공존할 수 없는가?

 

<기억 전달자>는 가벼우면서도 깊다. 표지 설명처럼 ‘디스토피아’ 소설의 맥을 잇는 명작이다. 광대한 우주, 인공지능, 과학기술의 발전을 다루지 않는다. 기억 보유자에게 인류의 기억을 전승시킨다는 개념은 오히려 <멋진 신세계>의 마약인 ‘소마’보다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그러나, 고통과 폭력을 배제하기 위해 자연의 색깔마저 봉인하고, 태어날 때부터 통제하고 임무를 배정하고, 규율을 어기거나 나이가 들면 ‘임무해제’되는 세상은 ‘갇힌 울타리 속 디스토피아’였다. 기억 보유자는 모두를 대신하는 희생양일 뿐이다. 어른들은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라고 종용한다. 슬픔과 분노, 사랑과 같은 감정은 잿빛 세상에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생산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살아가다가, 어긋나면 ‘고장 난 기계’처럼 퇴출하는 ‘정확한’ 세상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다. 통제 속에 안전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갈 텐가, 아니면 자유의지와 풍부한 감정으로 삶을 살아낼 텐가. 무엇이 행복인지를 논하고 있지 않다. 단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케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스토피아 소설은 SF소설 중 가장 차갑다.


우주는 알 수 없기에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검은 도화지 자체다. 무엇이 튀어나오든 원래 거기 있던 것이요, 볼 수 없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특별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주 속 먼지다. 의미가 있다면 ‘질량’?

 짧게 본 SF들은 내게 한 목소리로 말한다.

‘전쟁으로 서로에게 고통 주고, 다른 종을 착취하고 멸종시키는 너희 인간 종은 기필코 공존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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