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사이 Jun 09. 2024

자유의지를 믿는가

운명의 과학(한나 크리츨로우)/자유의지와 과학(앨프리드 R. 밀리)

자유의지, 결정론, 운명은 삶을 돌이켜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할 주제다.

인생을 확률의 문제로 보더라도 선택은 내가 한 것인데, 그 선택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또는 나의 삶과 죽음이 모두 빅뱅과 함께 정해진 숙명이라면?

지금 책을 펼친 당신은 적어도 남다른 자유의지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신경과학자 한나 크리츨로우는 뇌의 역할을 파고든다.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슬로건은 그다지 믿기 어렵다. 뇌는 가소성이 있으므로 평생에 걸쳐 생각과 행동을 바꾸며 인생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견해와, 인간이 내리는 결정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자동적 과정으로 유전자에 따른 커넥톰(뇌 속 정신 회로판) 및 작동원리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견해가 상반된다. 한나는 이 두 견해가 배타적이지 않고 우리가 마주하는 선택 상황에 따라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여행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신이 존재하는지와 같은 고민들을 떠올려 보자. 분명, 의식과 무의식 중 어느 하나만이 작용한다는 식의 일관된 주장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물론, 성격, 관점, 회복력,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 사랑, 역량, 역할, 신념 등 ‘나’를 규정하는 특질이 결국 ‘뇌’가 좌우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뇌’는 유전자 정보로 만들어진 유기 조직에 불과한지, 또는 가소성을 믿고 적절한 교육이나 환경, 보상체계 수정으로 바꿀 수 있을지, 심지어 크리스퍼와 같은 유전학적 치료가 가능할지를 논의하는 것이 합리적일 테다. 그렇다면, 주어진 ‘뇌’가 (가소성이 있다 할지라도) 삶을 결정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의식과 무의식은 모두 ‘뇌’ 속에 있는가? 자유의지가 능동적 ‘의식’ 작용이라고 한다면, 이 역시 주체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뇌’가 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런데, ‘능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청년의 진보, 노년의 보수 지향성은 뇌 노화의 일반적 효과이고,

내향성과 외향성은 전두엽 부피의 차이에 기인하며,

성 역할론에 대한 관념은 사회적 환경에 의한 고착화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좋고 나쁨,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뇌에 관한 한 ‘정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p136

내 신념이나 성향을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뇌는 바쁘다. 에너지도 아껴야 하고, 지름길을 선호한다.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면, 패턴을 만들어 익숙하게 한다. 따라서, 뇌가 각성하도록 적잖이 애쓰면 된다. 귀찮다면, 고집부리지 말고 다른 생각, 다른 행동에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자.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그냥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짝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다는 의미다’ p165


어쩌면,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는 인간 무리 속에 살아가는 ‘나’란 존재의 투정일지 모른다.

마치 이기적 유전자를 부정하며, 뇌가 몸뚱이를 통제할지라도 삶의 태도와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나’라고 따지는 듯하고, 한편으로는 ‘법’이라는 최소한의 도덕을 지탱하기 위해, 즉 책임을 묻기 위해 자유의지는 없어서는 안 된다고 조르는 듯하다.

한마디 거들자면, 인간이 ‘뇌’의 노예라고 한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도태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환경 변화를 따라잡기에 진화의 시간 척도는 매우 길기 때문이다. 7만년 전 인지혁명 후 과학의 도약은 불과 200년, 인공지능은 길게 잡아도 70년이다.

따라서, 뇌를 자유의지 밑으로 격하시키고, 자유의지를 조금은 신(God) 쪽에 둘 필요도 있겠다.


한나는 1980년 초 벤저민 리벳의 유명한 실험을 소개한다. p224

손목을 구부리는 행위에서 구부리겠다는 의식보다 뇌의 지시가 앞선다는 실험결과를 제시한다.

이는 이후 ‘자유의지란 없다’의 단골 근거가 되었다.


여기서, 자유의지에 대한 전방위적 접근을 고찰한 앨프리드 R. 밀리의 <자유의지와 과학>을 펼쳐 보자. 리벳은 결심(EEG뇌파측정)과 의식(실험자가 행위를 의도했을 때 시간 읽기)과 근육 운동(행위)을 각각 측정하고, 결심(행위 550ms전)이 의식(행위 200ms전)에 앞섰으므로 자유의지는 없고 이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일반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앨프리드는 반박한다. 자유의지가 결심인가, 의식인가? 결심부터 의식까지 일련의 과정이 자유의지의 발현이라 볼 수 없나? 실험자의 반응 지연은 없는가? 근육운동에 대한 일련의 실험만으로 모든 행위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리벳류 실험(심부 전극 실험 등 유사한 실험들)은 근거가 빈약하다.

‘자유의지에 관해 환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는 환상이다’ p175 <자유의지와 과학>


한편, 방관자실험,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감옥실험, 밀그램의 전기충격실험 등은 제약된 환경에서 행동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급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또는 죄수를 인간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또는 학생의 안전을 고려하여 전기충격을 멈춰야 한다는 ‘의지’의 여지는 과연 없었는가?

앨프리드는 희망을 제안한다.

적어도 이런 실험들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의 의지로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아는 것이 힘이다’ p146 <자유의지와 과학>


앨프리드는 (결정론과 대비되는, 열린 선택지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자유의지의 유무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온건한 자유의지(강제 없는 조건 속 합리적 선택 의지)는 존재한다고 답하며 마무리한다. 나 역시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믿는다. 증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유의지의 존재여부를 따져 묻기보다 방향성에 관심이 많다.

‘내 자유의지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한나는 가소성을 긍정하며, 연민, 협동, 호기심, 열린 마음을 품고 뇌를 사회적으로 연결할 것을 제안한다. 결국, 삶을 긍정하고, 늘 깨어있으며, 피부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자유의지’ 논의의 귀결이 아닐까.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 개인의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경험적 증거 역시 존재한다(Dweck and Molden 2008)’ p23 <자유의지와 과학>


그냥 믿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