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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자 Aug 26. 2023

진실인 팩트는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이다

앞선 글에서 팩트는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썼는데요, 그렇게 따져본 결과 진실인 팩트라도 진실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진실인 팩트가 진실이 아니다?'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돼 보이지만 진실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시죠.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습니다.' 그렇게 설명한다면 그 팩트는 진실이죠.

그럼 아래 그림은 어떤가요?

여전히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인가요? 물론 그것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다만 이 그림 전체를 진실되게 설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7명의 사람들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벌거벗은 남자가 누워 있는데,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가위처럼 보이는 도구를 이용해 벌거벗은 남자의 왼팔을 집어 들고 있습니다. 왼팔 생김새가 해부를 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라는 진실된 팩트가 그림 전체의 맥락 속에서 보니 진실이라 말하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습니다. 즉 전체 그림의 파편에 불과한 하나의 팩트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전체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으로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일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걸 꼬집는 말이죠.


문제는 '전체'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자면 '검은 옷을 입은 튈프 박사가 시신을 해부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작품으로서 이해돼야 합니다. 또 그보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문화 속에서 설명되어야 하고,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미술사 전체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끝없이 넓은 개념의 '전체'가 나옵니다. 요즘은 이런 걸 '메타인지'(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것)라고 하죠. 


그림 하나의 진실을 얘기하기 위해 전 우주를 설명해야 할까요? 그러다가는 그림 하나를 다 설명하기도 전에 죽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어느 순간에는 더 넓은 전체로 확장하는 것을 멈추고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끊어야 하죠?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1000명의 사람이 있다면 모두 내놓는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면 족하다 할 것이고, 누군가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시신을 해부하고 있다', 또 누군가는 '9명의 사람이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하나 거짓이 아닙니다. 즉 하나의 현상이라도 10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0개의 진실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문제를 기사로 쓰더라도 언론사마다 다르게 쓰는 이유, 여러 시각을 가진 언론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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