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욱 Sep 10. 2017

Comfort in the Uncomfortable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고 쓴 나의 이야기

한때는 나도 교회 오빠였다.


크지 않은 교회였지만 중고등부 회장이었고, 기타를 매고 찬양팀을 인도하는 리더였다. 금요기도회에서 뜨거운 기도로 불금을 이끄는 열혈 청년이기도 했다. 그때 나의 신앙은 어떤 것이었는지, 무엇이 그토록 나를 열정적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당시 난 상당히 '뜨거운' 교회 오빠였다는 점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에 왔다. 예전 교회의 형들을 따라서 '삼일교회'를 나갔다. 당시 숙명여대 대강당에서 예배를 봤는데 대부분이 청년들이라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매주 예배를 갈 때마다 사람 수가 늘어나는 게 확연히 보였다. 처음에만 해도 강당 뒤쪽은 썰렁했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강당 꼭대기까지 가득 메워지는 게 느껴졌다.


당시 너무나 유명했던 목사님(지금은 다른 사건으로 유명하다)은 상당히 흡입력이 있었다. 예배와 설교는 당연히 격식과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배가 이렇게 자유롭고 뜨거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청년들이 그러했듯 나 또한 신선한 체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몇 달 간의 탐색 끝에 나는 결국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설교의 내용과 형식은 참신했지만, 본인의 말이 진리인양 강요하는 태도가 불편했다. 누군가에게 교회는 우리가 받아온 주입식 교육처럼 '이것이 진리다'라고 알려주는 고마운 곳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단정 짓고 강요할수록  반감이 커지는 유형의 인간이었고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일단 자유롭고 싶었다. 수년간의 입시 생활, 그리고 유일한 휴일마저 교회에 헌신했던 나의 10대. 소소한 일탈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철저히 구속당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신앙은 흐려져갔다. 10대 시절 나의 불꽃같던 열정은 그저 한 때의 폭죽놀이 같은 것처럼 추억만 남았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지났다.


10년이 넘은 비 신앙인으로의 삶이었지만, 교회와 완전히 '단절'되지는 못했다. 부모님이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어린 시절 불알친구들도 교회 친구들이 많았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사람들은 환경적 배경을 벗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유년기의 정체성과 인적관계를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이고, 신앙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 관계들이 완전히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가짜 신앙인으로서, 명절과 같이 특별한 날에는 부모님과 단란하게 예배를 드리는 아들이었고, 옛 친구들에게는 여전히 훌륭한 신앙인으로 행세했다.


타인이 생각하는 익숙한 나를 부정하는 일은 편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외적 갈등보다 내적 갈등이 더 힘들다. 신앙에서 멀어져 있던 것이지, 신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꽤나 심각했고 개인적 실망감도 컸지만, 그렇다고 한국교회와 종교를 동일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떨어져 있는 시간이 꽤 길었을 뿐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그래서 일단은 교회를 다시 나가면서 생각해보자고 결심했다. 그저 집에서 가까운 교회 중에서 규모가 있는 곳을 찾다가 가게 된 곳이 '사랑의 교회'(공교롭게도 이곳 또한 추후에 논란이 매우 컸던 곳이다)였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따뜻한 기운을 얻는 일은 꽤나 괜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신앙. 그렇지만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노력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1년여를 다니다가 다시 그만뒀다. 신앙이란 마치 사랑처럼,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와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 신앙도 비슷하다.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는 없다. 믿음이란 노력의 정도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품은 결코 아니다.


일단 신앙을 가져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0년 만에 교회를 갔으나 실패했다. 그러고 나서는 내가 종교라는 것을 너무 기독교적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생활하다 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종교=기독교 or not' 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와 신앙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 더 폭넓게 알아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 와중에 우연히도 독서모임을 하나 알게 되었다. 당시 창업 1년 정도 된 신생 스타트업이었는데, 여러 클럽 중에 '신'에 대해서 토론하는 곳이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모임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얼른 가입했다. 클럽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원불교 교목, 무신론자 등이 섞여있었고 상당히 흥미로운 토론들을 했다. 키에르케고어, 리처드 도킨스와 원불교 등 타 종교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답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종교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더 관조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던 계기였다. 기존에는 기독교라는 답안지를 가지고 선택의 여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종교의 보편적 본질과 특성에 대해서 보편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교회에서도, 독서모임에서도 답은 없었다. 다만, 마음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생각은 '인간은 가장 고등한 동물이기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한다'라는 것이다. 우리 집 강아지에게 신적 존재는 아마도 나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체 중에서 가장 고등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완전한 존재다. 가장 고등해서 현실세계에서는 두려워할 존재는 없지만, 그럼에도 연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하는지를 떠나서 인간 본성은 신을 필요로 한다는 소결론. 신의 존재 여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건 신앙이 생겨야 비로소 신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나에게 어느 정도 구도자적 면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박진영 씨에 비할바는 아니다. 수년 전에 그가 힐링캠프에서 나와서 했던 말은 여전히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가 추구했던 건 돈-명예-봉사 순. 각각의 것들을 이루면서 인생의 행복감은 99%까지 높아져 갔지만 결국 1%의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본인은 과거 수십 가지의 우연들이 겹쳐서 일어나야만 가능했던 것이고, 이 확률을 생각하면 이를 인도한 절대자가 있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본인은 그 절대자를 찾기 위해 일주일 중 온전히 하루를 쓰고 있다는 고백.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가 나보다 앞서있겠지만 그 마음은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이후 그는 답을 찾았을까? 1-2년이 지나 궁금하던 차에 그의 새 앨범이 나왔다. 제목은 'Half Time'. 인생의 절반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남은 인생은 절대자의 뜻에 따라 살 수 있기를 원한다는 내용. 그런데 그중에 가슴에 박히는 가사 한 줄. "믿기는 하는데 믿어지지 않아, 믿기는 하는데 믿어지지 않아". 역시 그에게도 신앙은 어려운 것이었나 보다.


오늘 아내는 교회를 가고, 그 사이 나는 역설적이게도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읽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지금이 좋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될지, 더욱 멀어지게 될지는 알 수없다. 어찌 되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건 각자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정답을 찾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종교와 신앙에 대해 고민을 이어가는 건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이며 의지다. 인간의 레벨에서 최상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절대자가 존재하고 그 질서에 어긋난다면 그 인생은 다소 무의미하다. 절대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전심으로 노력하고, 수단적 존재로서 내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게 낫다. 한편 그렇지 않다면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나란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는 게 가치 있는 삶일 것이다.


박진영 씨의 바람처럼 누구나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러셀의 말처럼 종교는 불완전한 인간의 정서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불완전함도 그저 우리의 존재적 특성일 뿐,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걸 끌어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의 평범한 진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이전글 꾸준함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