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케라마 제도에서 만난 푸른 세계
샤워를 마치고 차게 식혀둔 맥주를 꺼냈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캔을 따고, 차가운 탄산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감촉이 유난히 생생하다. 등과 뒷목은 흘깃 봐도 화끈하게 익었다. 당분간 고생 좀 하겠군. 하지만, 그토록 그리던 바다에 왔는데 피부 좀 타는 게 대수일까.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에는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강렬한 윤슬이 부서진다. 다이빙을 마치고 돌아온 오후, 하루 동안 마주한 경이로운 순간들을 기록해 본다.
2017년 태국에서 처음 다이빙을 시작한 지 벌써 7년째. 몇 년에 한 번씩 여행하며 느긋하게 즐기는 탓에 아직 로그 수 100회를 넘기지 못한 만년 초심자지만, 이른 아침 보트를 타고 다이빙 포인트로 향하는 순간이 더는 낯설지 않다. 오키나와 본섬에서의 다이빙은 이번이 두 번째로, 처음은 자격증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오키나와로 가족여행을 오게 되어 하루 시간을 내서 홀로 바닷속을 경험했다. 그때의 짙푸른 쪽빛이 뇌리에 깊게 남아 꼭 다시 찾고 싶었던 바다. 다시 돌아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솔로 다이빙에서 '버디'가 누구인지는 꽤 중요하다. 하루 세 번씩 바다에 들어가며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파트너이기 때문. 이번에는 나처럼 홀로 여행 중인 청년과 한 팀이 되었다. 다이빙샵에서 오전 7시 20분에 모여 장비를 챙긴 후 항구로 향하는 동안 새로 만난 버디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T는 올해 7월 다이빙을 시작했고, 국내에서 교육을 받은 후 처음으로 해외 펀다이빙을 왔다고 했다. 처음. 얼마나 설레는 단어인가! 나는 진심 어린 부러움과 동시에 그의 처음을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 모든 처음은 단 한 번뿐이니까. 앞으로 더 멋진 순간들이 있겠지만, 처음이 주는 강렬한 충격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항구에 도착해 장비를 준비한다. 태국이나 필리핀 같은 동남아에서는 헬퍼들이 모든 장비를 챙겨주지만, 이곳에서는(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호흡기와 탱크는 직접 세팅해야 한다. 오랜만에 호흡기를 붙들고 씨름하는 나와 달리, 오늘의 버디 T는 차분하게 장비를 세팅했다. 나는 조금 민망하게도 그의 도움을 받아 호흡기와 탱크를 연결할 수 있었다. 배에 승선한 후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전신 웻수트를 입는다. 웻수트는 입을 때마다 고역이지만, 막상 입고 나면 그 빡빡함에 금세 적응하게 된다.
오전 8시, 출항. 우리는 배의 선미에 자리를 잡았다. 본섬에서 동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케라마 제도로 향한다. 케라마는 투명한 시야와 풍부하고 다양한 해양 생물들로 유명한 오키나와의 다이빙 명소다. 이른 아침, 바다로 나아가는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오늘 바다는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드넓은 수평선을 향해 거센 바람을 가르며 1시간을 달리자,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섬이 점점 가까워지며 배의 엔진 소리가 잦아든다.
오늘의 다이빙은 한국인 네 명씩 한 조로 구성된 두 팀과 일본인 두 명으로 구성된 한 팀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팀이 먼저 입수하고, 우리는 다음 순서였다. 웨이트 벨트를 착용하고, 부력 조절 자켓을 입고, 핀을 신는다. 모든 장비가 제대로 체결되었는지, 호흡기가 정상 작동하는지, 마스크를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마지막 점검을 마친 후 배의 후미에 선다. 2년 만의 다이빙. 첫 입수의 순간에는 침착하고 싶지만 언제나 흥분이 머리끝까지 솟구친다. 호흡기를 물고 마스크를 고정한 채 바다를 향해 한 발 크게 내딛는다. 풍덩. 시야를 하얗게 가리던 공기방울이 사라지고 나면,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다이빙의 매력 첫 번째, 저렴하고 안전한 우주여행
다이빙의 매력을 말하자면 끝이 없겠다만, 가장 먼저 공중을 유영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저렴하고 안전하게 우주여행을 하는 기분이랄까. 배 위에는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장비도 물속에서는 무게를 잊고 편안하기만 하다. 발아래 펼쳐진 산호 군락을 향해 천천히 킥을 차며 내려간다. 산호와 바위 사이에는 작은 물고기 떼가 낯선 방문자를 피해 재빠르게 방향을 바꾸며 도망치기 바쁘다. 모두 내려오면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유영을 시작한다. 첫 포인트는 체크 다이빙 같은 느낌으로, 우선 호흡을 가다듬는다. 긴장한 탓에 입수하자마자 공기를 20 바나 소비했다. 하지만 몸이 익힌 감각은 금세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중성부력과 유영 자세가 한층 편안해졌다. 이제는 풍경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오키나와 바다는 푸른 물빛과 뿔처럼 솟은 경산호 군락이 특히 아름답다. 색깔이 다채롭지는 않아도, 언덕을 빼곡히 채운 건강한 산호 군락을 보고 있으면 안심이 되면서도 이 바다가 언제까지나 지금 모습 그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바다뱀 한 마리가 발밑을 구불거리며 지나간다. 육지에서 뱀을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겠지만, 바다에서는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맹독을 지녔음에도 독니가 매우 짧은 이 녀석은 일부러 건드리지 않는 한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뱀은 이내 숨을 쉬기 위해 수면 위로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올라간다.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 검은 형체가 어른거린다. 날렵한 유선형의 몸과 확실한 모양의 지느러미. 상어다! 입수 전에 상어를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감사하게도 상어가 나타나 주었다. 1m 남짓한 작은 크기였지만, 상어는 상어다. 지느러미 끝에 먹물을 살짝 찍은 듯한 블랙팁 샤크. 상어는 예민한 동물이라 다이버의 공기방울 소리만 들려도 멀찍이 피한다고 한다. 녀석도 우리를 인식하자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산호초 사이를 유영하다 보면 정말이지 코앞에서 온갖 물고기들이 스쳐 지나간다. 거무튀튀한 색깔의 자리돔과 비슷한 녀석들, 노랗고 둥근 나비고기, 그리고 그 유명한 '니모'도 있다. 참고로 니모로 알려진 흰동가리는 영역 본능이 강한 편이라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치지 않고 사람을 빤히 바라보며 경계하기 바쁘다. 어떤 녀석들은 다이버를 향해 그 조그마한 몸으로 달려들며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물살을 따라 살랑이는 말미잘 촉수 사이로 반쯤 몸을 내놓고 나를 째려본다. 참으로 하찮고 귀여운 생물이지않나.
그렇게 물속 세계를 떠다니며 이리저리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35분 정도 지나자 올라가자는 사인을 받는다. 출수는 늘 아쉽다. 발밑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뭍에서 잠깐 내려온 방문객이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사다리를 밟아 배로 올라간다.
다이빙의 매력 두 번째, 깨끗하게 머리를 비우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
다이빙은 빠르게 이어졌다. 배로 돌아와 탱크를 교환한 후, 근처의 또 다른 포인트로 이동한다. 조금 쉬면서 기다리다 보면 다시 입수할 시간이다.
두 번째 포인트에서는 바다거북을 만났다. 사실 거북이야 이제는 그렇게 새롭지 않지만, 여유롭게 수면을 향해 헤엄쳐 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산호초 위의 보랏빛 안티아스 무리 옆을 스쳐 지나갈 때는 정말이지 황홀하다. 마음을 가라앉히면 호흡도 점점 더 여유로워진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다. 한때는 이 공기방울 소리를 유튜브에서 찾아 듣기도 했었다. 이곳에는 공기방울이 잘게 부서지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체 불가능한 평온만이 남는다. 그래서 다이빙은 아름다운 지구와 함께하는 호흡 명상이다.
두 번째 다이빙을 마치고 올라와서 점심으로 가져온 도시락을 먹었다. 호흡기의 마우스피스를 꽉 무는 습관이 있어서인지, 음식을 씹을 때마다 어금니 쪽의 감각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야무지게 먹고 버디와 간식도 나눠 먹었다. T는 말수가 많지는 않지만, 내가 먼저 말을 걸면 조곤조곤 잘 대답해 주었다. 딱 그 정도의 거리감과 온도가 좋았다.
수면 휴식 시간에는 수영을 해도 된다고 하기에 곧바로 핀과 마스크를 쓰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웻수트를 입고 있어서 깊이 들어갈 수는 없고, 숨이 가쁘게 차오르지만 이 아름다운 바다에서는 물장구만 쳐도 즐겁다. 발아래 펼쳐진 투명하고 깊은 세계. 수면 근처에서 치어들이 반짝인다. 얕은 바다로 쏟아지는 햇빛 아래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찬란한 비늘들. 무구히 아름답다. 이 순간이 영원하면 좋겠지만, 모든 좋은 시간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기 마련이다. 나는 그 황홀경에 취해서, 잠시나마 뭍의 세상사를 잊기 위해 자꾸만 물밑으로 내려오게 되는 것일 테다. 폐호흡을 하게 된 영장류가 이토록 잠수를 원하는 것은, 어쩌면 아주 먼 옛날 바다에서 살았을 적 유전자에 새겨진 크나큰 기쁨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