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코지부터 마크롱, 그리고 2017년 총선까지.
프랑스에 관한 소식은 다른 나라에 비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는 편입니다만, 그래도 뉴스를 보면 좀 피상적으로 전달되는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 매거진에서는 제가 현지에서 느끼는 바, 현지 언론에서 전하는 것들을 가끔씩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 다뤄보려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선거가 항상 일요일에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 2017년 6월 18일 일요일은 프랑스의 총선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상원과 하원으로 국회가 나뉘어 있는데요, 양원제의 대부분의 나라와 같이 하원을 뽑는 선거를 총선 Election legislative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총선은 5년에 한 번씩 4월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이어 같은 해 6월에 치러집니다. 즉 6월에 있는 국회의원 선거가 그 전 해에 대선 경선부터 시작해 1년 넘게 펼쳐지는 주요한 몇몇 레이스들의 피날레가 되는 것이죠. 이번 총선은 어떻게 보면, 2012년 프랑스와 올랑드가 니콜라 사르코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강력한 적대심을 업고 당선된 후 자신의 지지율을 어디까지 떨어트릴 수 있는가를 5년간 주욱 보여주다가, 말 그대로 혜성같이 나타난 젊은 정치 신인 엠마뉴엘 마크롱이 나라를 휩쓸며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의 2000년대 초반 프랑스 정치사의 굴곡을 일단락 짓는 정치 이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단락은 일단락 일 뿐, 이 파도의 굴곡이 잠잠해 지기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습니다만 프랑스의 모든 선거는 2차에 걸쳐 치러집니다. 프랑스는 꽤 오랫동안 양당을 중심으로 한 다당제의 정치체제를 유지해 왔는데요, 양당은 현재의 공화당 Les Républicains과 사회당 Parti Socialiste이 될 것이고, 그 좌, 우, 중도로 다양한 당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한국에 잘 알려진 다른 정당으로는 극우정당인 국민전선 Front National 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다양한 당들이 모여서 한 번에 선거를 치르면 당선된 후보가 과반은커녕 유의미한 득표율을 올리기가 어려울 경우가 많기 때문에 1차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2명의 후보를 추려 2차 투표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항상 2주간의 간격을 두고 2번의 투표를 하게 되는데 이번 총선의 경우는 1, 2차 투표 모두 역대 최악의 투표율을 기록했습니다. 특히 2차의 경우에는 무려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와 혁명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에서 겨우 40%가 조금 넘는 투표율이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하기 전에 저는 시계를 조금 앞으로 돌려 대선 1차 투표 이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현재는 대통령이 되어 있는 엠마뉴엘 마크롱은 40대에 갓 진입한 정치 신인인데요, 사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정치에서만 신인일 뿐 프랑스에서도 1% 안에 드는 기득권층에 완벽하게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다양한 음모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로스차일드 Rothschild에서 은행가로 일했고 그 이후 사회당에 살짝 발을 걸치다가 망해가는 올랑드 정부에서 산업 경제부 장관까지 역임하고 있었죠. 그러던 그가 장관직을 내려놓고 대선 출마 선언을 한 것이 겨우 2016년 8월, 대선을 8개월 즈음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중요한 변곡점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공화당의 프랑스와 피용이 가족과 관련된 스캔들로 지지율이 날려 먹은 것도 그가 대통령이 되는데 큰 역할을 했죠. 하지만 저는 그런 것보다 그가 만든 당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는 대선에 나서면서 전진 en marche!라는 당을 만들었는데요,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는 이 당의 이름을 전진하는 공화국 La République En Marche(줄여서 REM이라고도 부릅니다. 저는 이 당 보다 그 그룹이 훨씬 좋습니다.)이라고 바꿔서 총선에 선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시면 이 당의 이니셜이 E.M.입니다. 네, 엠마뉴엘 마크롱의 이니셜과 같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를 거의 다루지 않는데, 저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당명을 지었다고 거의 확신합니다. 제 확신은 별로 중요하진 않습니다만, 대선 레이스에 들어와 올해 초가 될 때까지 이 당에 진정한 정치적 플레이어는 엠마뉴엘 마크롱 혼자였다는 점에서 en marche! = Emmanuel Macron이라는 등식은 전혀 틀린 점이 아닙니다.
En Marche!의 로고는 원래 꽤 심플했습니다. 그리고 E와 M이 상당히 돌출되있죠. 제가 이 당은 엠마뉴엘 마크롱 일인의 대선을 위한 당이라고 생각하게 됬던 그 로고입니다.
21세기 프랑스가 어떤 역사를 써내려 갈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직 없겠습니다만, 이번 대선과 총선이 그 역사의 중요한 축을 이룰 것이라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만큼 엠마뉴엘 마크롱이라는 정치 신인의 대통령 당선과 이번 총선에서 REM이 얻은 과반의석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그리고 en marche! = Emmanuel Macron라는 등식이 중요성을 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르코지와 올랑드를 거치면서 프랑스인들은 정치 세력에 대해 상당히 큰 혐오감을 키워 갔습니다. 실제로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랑제콜 Grandes Ecoles 출신이고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기득권은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출신들이 만들어 놓은 것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ENA라는 국립 행정 학교라는 곳이 유명한데요, 좌파의 사회당도 우파의 공화당도 중요한 인물들은 모두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지요. 참고로 마크롱도 이 학교 출신입니다. 이런 면 때문에 그가 기득권에서 그리 먼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마크롱은 '젊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존 정치 체계에 들어있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에 당선까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극우 정당 대선후보였던 마린 르펜을 막기 위해 선택된 인물 정도로 평가하지만 저는 그게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로 손꼽을 수 있었던 사람은 마린 르펜, 엠마뉴엘 마크롱, 프랑수와 피용, 장 루크 멜랑숑 정도인데요, 이 중 피용을 제외한 나머지 3 사람은 모두 기존의 양당 체제 밖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멜랑숑은 좌파전선 Front Gauche 가 주가 되어 재창당 된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La France insoumise라는 좌파 정당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 구도를 마린 르펜의 극우파 대 정상 정치인으로 분석했지만, 어찌 보면 한 날개를 잃은 양대 정당 대 군소 정당 후보들의 대결 구도이기도 했었던 것입니다.(사회당의 브누와 아몽도 꽤 의미 있는 지지세를 얻긴 했었습니다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승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대선 출마 선언을 하는 시점에서 단 한 명의 국회의원도 보유하지 못했던 en marche! 의 엠마뉴엘 마크롱이 된 것이지요.
왼쪽 밑부터 프랑스 공산당 - 군소 좌파정당들 - 사회당(붉은색), 급진좌파(분홍색) - 녹색당 - 지역주의당 - 민주주의 운동(MoDEM, 주황색) - REM - 민주주의와 독립 연합 - 공화당(파란색) - 군소 우파정당들 - 국민전선(회색) - 극우
출처 : Wikipedia 프랑스, 만든이 : Ternoc
그런 관점에서 이번 총선을 한번 보겠습니다. 총선 결과는 마크롱의 REM이 총 577석 중 308석을 가져가며 단독으로 과반을 넘겼습니다. 사회당은 29석을 얻었습니다. 지난 총선, 즉 올랑드가 당선된 해의 총선에서 사회당은 280개의 의석을 갖고 있었습니다. 십 분의 일로 찌그러 든 것입니다. 공화당은 그나마 낫습니다. 113석을 가져갔으니까요. 하지만 공화당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사회당은 아예 가루가 되어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공산당 등의 기타 좌파 정당 사이에 들어있는, 원내에서는 그저 그런 정당이 되어 버렸습니다만 공화당은 그래도 꽤 많은 좌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113석은 사회당에 비하면 많은 숫자지만 공화당 역사상 최악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 내부 분열이 생겼다는 소문이 솔솔 들리고 있습니다. 르펜의 극우정당 국민전선은 8석을 차지해서 다행히 한국의 원내 교섭단체와 비슷한 프랑스 국회의원 내 단체인 그룹 Groupe을 만들지는 못하게 됐습니다. 그룹은 1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반면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당은 17석을 얻어 그룹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그 외 중요 정당은 42석을 얻은 중도당 MoDEM이 있는데요, 이들은 REM과 선거연대를 해서 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겨우 40%의 유권자가 투표한 이 선거에서 사회당과 공화당의 양당체제는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마크롱의 REM은 굉장히 많은 수의 새 국회의원들을 배출했고, 이중 상당수가 여성입니다. 이 덕에 프랑스의 여성 국회의원 숫자도 역대 최고를 갱신하게 됐습니다. 즉 이번 선거의 결과는 외형적으로는 프랑스의 기득권 정치 프레임을 상당 부분 해체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상당히 적은 숫자의 국민이 참여하긴 했지만 그 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몇십 년간 표를 주었건만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양대 정당은 사라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크롱은 대통령이 될 때부터 1차 대선 투표에서 전 유권자 중 15% 정도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던, 기반이 아주 약한 후보라고 공격받아 왔습니다. 그런 그의 정당이 불과 2달여 만에 열린 총선에서 과반을 넘는 의석을 얻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프랑스인들이 그에게 기대는 하지 않을 망정 꽤 크나큰 짐을 지워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지금 당장 개헌 같은 것을 통해 정치의 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니, 어쨌건 새로운 사람이 대거 유입될 수 있는 창구를 찾아서 거기다 표를 준 것입니다. REM의 308석은 그들에게 날개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인들이 마크롱의 등에 얹은 짐꾸러미의 무게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리베라숑지 La Libération 에 따르면 이번 국회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직업군은 '임원 Cadre'입니다. 지난 국회에서는 공무원이 최다수 직종이었는데 이번에는 기업의 대표나 임원들이 의회에 가장 큰 지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577명 중 185명이 회사의 임원 출신이랍니다. 그럼 블루칼라 노동자 직업군은 어떨까요? 놀랍게도 0명입니다. 보통 회사의 직원 출신이 51명이지만 여전히 고위공무원이 130여 명이고 변호사, 건축가, 의사 같은 자유직 Profession libéral 이 88명입니다. 577명의 국회의원 중에 90% 국민을 대변할 수 있는 직종을 갖았던 사람은 이번 국회에서 겨우 50여 명 즈음, 10%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전선으로 대변되는 것 같았던 블루칼라 노동자 직군의 국회의원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REM에도, 사회당에도, 국민전선 에도요. 게다가 기업 임원들이 국회를 접수한 상황. 로스차일드 출신 기업가 대통령에 더해 프랑스가 신자유 주의화, 친 기업화될 것이 거의 확실해지는 지표입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 행정 기득권 세력을 국회와 엘리제궁에서 몰아내기 위해서 경제 금융 기득권을 과반 집권여당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아이러니컬 하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국민들을 포함한 여론조사에서 60% 이상이 마크롱의 정치개혁을 위해 REM이 과반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투표율이 낮은 것은 마크롱과 REM이 어떤 세력을 대변할 것인지 너무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이었지, 투표 미참여 세력이 마크롱에게 힘을 실어줄 생각이 없었던 만은 아닙니다.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정치 행정 개혁이 경제 개혁만큼 중요하다는데 이미 동의를 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크롱은 첫 번째 개혁법안으로 행정 개혁이 아닌 노동법 개혁을 내놓았습니다. 물론 노동유연화를 위한 것이지요. EU와의 관계, 영국과의 관계, 이민자 문제, COP 21을 향한 환경 문제, 그리고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취업률 문제까지 그가 거쳐가야 할 관문은 너무 많습니다. 그 관문을 모두 지나면서 마크롱이 정치 개혁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집회와 시위의 나라 프랑스에서 첫 개혁법안으로 노동법을 선택한 것은 그의 허약해 보이는 정치기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뭐하나 쉬운 것이 없어 보이는 질문들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의 개혁은 마크롱과 REM으로 이제 겨우 촉발되었을 뿐,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크롱의 정치 도전도 이제 시작이지만 프랑스 정치의 변동도 이제 겨우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어쨌건 프랑스는 선택을 했습니다. 올랑드의 몰락 드라마의 끝은 결국 프랑스 기성 정치의 붕괴였습니다. 이 바탕에 프랑스가 심은 싹, 마크롱과 REM은 어떤 나무가 될지, 아니 나무가 될 수나 있을지 지켜봅시다.
커버사진 : 2014년 올랑드 정부의 장관직을 수락하는 마크롱. 사진 : 프랑스 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