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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최집사 Aug 09. 2023

5. 니가 없는 너의 자리

'유자'로 기억되는 공간 

고양이들과 함께 산 지 7년이 넘은 집의 이곳 저곳엔 '유자'로 기억되는 장소들이 여러 개 있다. 익숙해진 그림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그 곳에 있어야할 유자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적응하기 힘들었다. 거실 책장 위, 캣폴 가장 높은 곳의 해먹, 화장실 앞 규조토 매트 까지. 유자가 좋아하고 자주 머물던 자리에는 이제 유자가 없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집에, 유자만 없다.




우리끼리 '고소 애정냥'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유자는 유독 높은 곳을 좋아한다. 고양이들은 크게 높은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는 타입과 어딘가에 몸을 숨겨서 평안을 얻는 타입으로 나뉜다고 한다. 유자는 명확히 전자, 율무는 명확히 후자의 고양이다. 낯선 사람이 오거나 집안이 소란스러워 예민해질 때 유자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우리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인 책장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고양이들을 위해 아주 무거운 책장의 벽면에 스크래처 패드를 붙여서 캣타워처럼 만들어주었다..ㅎ) 반면 율무는 누구보다 낮은 자세로 뛰어 터널이나 숨숨집에 들어간다.


집사는 위에서 내려다 봐야 제 맛


때문에 유자는 하루중 많은 시간을 책장 위에서 보냈다. 컨디션이 안 좋거나 뭔가 불편하거나 약 먹을 시간이 다가오면 더더욱 꼭 그 자리에 있었다. 사람의 눈높이가 닿지 않는 곳에, 반대로 본인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에. 유자가 떠나기 전, 1년 동안은 유달리 유자의 컨디션이 좋았다. 바꾼 약이 잘 맞으면서 폐수가 차서 병원에 가는 일도 없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일도 없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다보니 볼살도 오동통하게 올라서, 한창 거식증이 있을 때 3.2kg 까지 빠졌던 몸무게가 5kg을 넘겼다. 워낙 체구가 작고 앙증맞은 생김새 때문에 유자는 살이 쪄도 다람쥐처럼 볼만 통통해져 귀여웠는데, 높은 책장에 올라가 있을 때 아래서 보면 백만 배 더 귀여웠다.


사냥도 꼭대기에서 해야 제 맛


날이 더울 때는 주로 책장에 올라가 널어져있는 유자가 겨울에 잘 찾는 곳은 캣폴 꼭대기의 해먹이었다. 사실 유자는 온갖 종류의 해먹은 다 좋아해서, 캣폴 꼭대기의 천 해먹도, 캣타워 꼭대기의 투명 해먹도, 창문에 붙이는 선반형 해먹도 모두 유자 차지였지만 특히 천 해먹을 좋아했다. 동그란 해먹에 꼭 맞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거나, 한쪽 다리를 쭉 내밀고 자거나. 해먹 아래로 핑크색 젤리를 내밀어 집사를 유혹해 놓고는 조금만 만지면 정색으로 하고 얼른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게 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집요하게 부드러운 찹살떡 발등을 만지곤 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집사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던 유자라, 유자가 떠나고 나서 '이제 정말 제일 높은 곳에서 집사들 내려다 보고 있겠구나'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투명 해먹 위의 사슴 한 마리
난 널 유혹 하는 거란다~


책장과 해먹 뿐 아니다. 화장실 앞에 물에 젖은 발을 닦기 위한 용도의 규조토 매트도 유자의 애정 스팟이다. 흙으로 만들어진 딱딱한 매트다보니 거기서 구르면 꼭 모래 바닥에서 뒹구는 느낌이 들었나보다. 유자는 기분이 좋거나 애교를 부리고 싶어지면 총총총 걸어서 규조토 매트에 쓰러졌다. 그리고 배를 보여주며 이리 저리 뒹굴었다. 워낙 도도한 매력의 고양이이기 때문에, 유자가 규조토에서 몸을 뒤집을 때 마다 집사들도 같이 뒤집어졌다. 유자가 투병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애교가 많아져 규조토에서 구르는 날도 많아졌다. 보통 출출하거나, 심심할 때 집사를 이끌고 매트로 가서 배를 까고 몸을 뒤집는다. 내가 이 정도 애교를 부렸으면 뭐라도 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사랑스러운 제안이었다.


이렇게 우리 집에는 여전히 '유자'로 기억되는 공간들이 있다. 서울에 살며 고양이들이 있는 본가에 한 달에 한 두 번 내려가는 나는 여전히 집에 들어설 때마다 유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게 낯설고 슬프다. 책장 꼭대기에서 거만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는 유자가 없어서, 해먹에 빼꼼 하고 나와있는 작고 앙증맞은 젤리가 없어서, 규조토 매트 위에서 치명적인 구르기를 보여주는 유자가 없어서. 모든 게 그대로인데 유자만 없어서. 유자가 없는 집안 풍경이 이상하지 않아지는 그런 날이 올까.


언제나 위에서 집사를 지켜보고 있을게냥





유자와의 추억, 펫로스에 대한 이야기. <떠난 자리에 남은 것>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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