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최집사 Apr 12. 2024

오래 된 것들의 아름다움

나홀로 교토 여행기 02

아침 일찍 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일찌감치 가야 사람이 적다는 말에, 8시 30분 쯤 호텔에서 나와 걷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거리는 도보로 20분. 호텔서 나오자마자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맑고 반짝이는 하늘이 나를 맞이해, 1분에 한 번씩 멈춰서서 주변 사진을 찍느라 가는 데 30분도 넘게 걸렸다.


기요미즈데라는 교토를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 관광을 하러 온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관광명소를 안 가기도 뭐하니 첫날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를 돌기로 했다. 첫 타자가 기요미즈데라였다. 교토의 관광명소는 모두 오래된 곳이다. 천년 수도라고 불릴 만큼, 교토는 오랜시간 일본의 수도였기에 일본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점이, 이전에 방문했던 오사카와는 조금 다르다고 느껴졌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화려한 색


기요미즈데라는 무려 778년에 최초로 지어졌다. 물론 그 이후 수없이 무너지고 지어지고를 반복했지만, 본당을 비롯한 현재의 건물 대부분은 1633년에 재건 된 것이라고 한다. 그것만 해도 벌써 400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고 간 기요미즈데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주변을 둘러싼 산의 경관 덕에 더더욱 그랬겠지만, 독특한 본당의 형태가 인상깊었다.

특히 서양에서 온 관광객들은 마치 나무 기둥들을 대충 얹어 놓은 것 같은 구조에 몹시 놀라는 듯 했다. 나 역시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저게 이 많은 사람을 버텨낸다니.

아침 10시가 조금 넘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인왕문 쪽과 본당 쪽 말고, 옆으로 조금만 비켜서면 제법 한적하다. 그리고 그곳엔, 화려하진 않지만 꿋꿋하게 제 자리를 오랜 시간 지켜온 나무들과, 석상들이 있었다. 그 곳에서 한참동안 머물렀다.

이 정도면 사람 정말 없는 편 ㅎㅎ


기요미즈데라를 지나 산넨자카, 니넨자카, 야사카 신사까지 돌고 근방에서 라멘을 먹었다. 그리고 카모강 줄기를 따라 너무나 아름다운 강변 산책을 즐기고, 헤이안 신궁에 도착했다. 신궁은 가볍게 둘러보고 정원은 들어가지 않았다. 오전부터 빡세게 걸어다닌 탓에 몹시 피곤해졌으므로, 근처의 근사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쉬어갔다.


본래 첫날의 계획은 여기까지였다. 여행 기간도 길고, 타이트하게 돌아다닐 의무도 없기에 관광지 돌기는 이쯤에서 그만 두어도 괜찮았디만,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인지 나는 철학의 길을 지나 은각사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계획대로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여행의 가장 큰 계획이었으니.


이번엔 버스를 탔다. 여태 걸어다녔으니 버스를 타고 싶어졌다. 근방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니 그 유명한 철학의 길이 펼쳐졌다. 좁은 강변을 따라 아름답게 늘어진 벚꽃 나무들이 인상깊었다. 꽃이 지는 시기이기에 강물이 온통 꽃잎으로 덮혀 묘한 광경을 만들어 냈다. 철학의 길이 벚꽃 명소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직접 걸으면서 '이 좁은 길에 사람이 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방문한 오늘은 그나마 벚꽃 절정기를 지나서였는지 비교적 한산했다. 


은각사라고 불리는 '지쇼지'는 철학의 길 끝에 있었다. 화려한 금박으로 둘러쌓인 금각사와는 달리 수수한 느낌의 사찰이 묘한 분위기를 냈다. 기요미즈데라에서도 느꼈던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은각사는 또 느낌이 달랐다. 국보로 지정된 본당과 도구도 불당은 정말이지 오래된 건물 그 자체였다. 보물이라고 해서 대단히 보물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그저 소박한 목재 건물이었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 온 건물들 앞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모래 정원은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게 만든다. 이 모래 정원은 너무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기에. 

모래 정원



개인적으로 은각사의 묘미는 오래된 건물도, 모래 정원도 아닌 '이끼가 가득 낀 나무와 숲'이라고 생각한다. 은각사 뒤로 펼쳐진 아름다운 숲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유롭게 흩뿌려져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마치 지브리의 <모노노케 히메>를 떠오르게 하는 이끼 숲을 보면서 (물론 진짜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이 된 곳은 따로 있다.) '여기 있는 이 나무들도, 땅도, 바위들도 모두 은각사와 함께 시간을 버텨냈구나.'하는 생각에 잠겼다. 

너무 신비로웠는데. 사진에 안 담긴다.


언덕 정도의 높이인 산책로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교토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높은 곳에 가서 내려다보면 아파트가 대부분인 서울과 다르게, 나지막한 집의 지붕들이 만들어내는 행렬도 예뻤다.




나는 왜 오래 된 것을 좋아할까. 아니, 나 뿐만이 아니라 왜 사람들은 이 오래된 것들을 보기 위해 이렇게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 줄을 설까. 나는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 이유가 오래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또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좋아해서라고 생각한다. 오래 될 수록 더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까.

매 번 새 봄을 맞이하면서, 내 삶에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듯이, 오래 된 이 건물들과 땅에도 그렇지 않은 것들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을테니.


시간여행을 하고 온 기분으로 호텔에 돌아오니 온 몸이 쑤신다. 유럽여행을 하듯 빡세게 돌아다닐 계획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기분만은 좋다. 따뜻하고 즐겁고 포근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온 기분이다.


내일은 관광지보다는, 교토에 사는 사람이 되어 주말 소풍을 가려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 혹사한 발을 잘 풀어주고 자야지.










작가의 이전글 떠나요, 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