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교토여행기 05
교토에서, 아주 재미난 경험을 했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2일은 하고 싶은 것, 다시 가고 싶은 곳에 집중하기 위해 많이 비워두었기에, 어제는 꽤나 여유로운 일정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영화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명탐정 코난> 극장판도 하고 있었고, <하이큐>, <오펜하이머>, <듄2>, 알만한 영화들이 잔뜩 있었으나, 내가 고른 건 난데 없는 <天號星(천호성)>이라는 작품이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일본의 유명 극단 '신감선'에서 제작한 공연인데, 올 봄에 공연 실황이 영화로 최초 공개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일본에 가서, 3시간 짜리 일본의 공연무대를, 일본어도 모르는 주제에 영화로 본 것이다. 내가 왜 이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었는지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다.
극단 신감선의 유명작(이라고 해봐야 일본에서고, 한국에선 아무도 모른다) <촉루성의 7인> 시리즈를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보고 난 후, 일본의 찬바라물에 관심이 생겼다. 작품을 통해 극단 '신감선'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국공립이 아닌)극단의 형태로 이렇게까지 성공하는 사례가 없기에 꽤나 흥미가 생겼다. 이후 차기작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하던 차에 작년 가을 신작 <천호성>이 나왔고, 그게 하필 내가 일본 여행을 하는 시기에 영화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안 볼 수가 있나.
어찌되었든 영화를 보고 나서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재미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일본어를 모른다. 여행 와서 간단히 인사하고 답변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 그친다. 그럼에도 생판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연기하는 3시간 짜리 공연이 재미있었다면, 이건 어떻게 된 일인걸까. 공연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창작자로서, 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재미란 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통해 재미를 느끼는가.
<천호성>의 아주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정확히는 모르나)어느 마을의 평화를 위해 조직을 운영하는 말 뿐인 두목(사실 바지사장같은 느낌일 뿐, 진짜 수장은 아내다) '한베에'와 그를 죽이려던 킬러 '긴지'가 날벼락을 맞고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우리가 흔히 아는 바디 체인지물이다. 둔하고 온순하며 실제로 사람을 죽인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장년의 남성과, 돈을 위해 누구든 죽이는 냉정한 킬러의 바디 체인지. 뻔하다면 뻔하다고 말 할 수 있지만, 어찌보면 그만큼 익숙하면서도 대중성이 증명이 된 서사이다. 나는 <천호성>을 통해 '서사가 줄 수 있는 재미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공연에서 배우들이 떠드는 대사의 대부분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장면에서 일본인 관객들이 킥킥댔지만 나는 영문을 몰랐다. 분명 말 장난도 있었을 것이고, 깊은 내면의 고백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상황, 즉 갈등상황과 감정만큼은 명확하게 와닿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 서사적 재미가 굵직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창작을 하면서 자주 부딪히게 되는 벽이 있는데, 이야기를 자꾸만 어렵게 만드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해서는 안 돼.', '뭔가 숨겨진 의미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와 같은 착각에 빠져서, 정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기본 서사 구조를 단단히 세우는 일에는 소홀해진다. '있어 보이는' 작품을 만들려고 애를 쓰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이 실수를, 나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면서 늘 반복하곤 한다. 몇 번이고 되돌아가고 뜯어고치면서, 결국 부실했던 기초공사를 뒤늦게 완성하고 만다.
낯선 타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공연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긴장감을 갖고 볼 수 있었던 데는,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스토리, 공감되는 갈등 상황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것 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역시나 화려한 액션이다. '찬바라'는 쉽게 말해 '칼싸움 물'로, 일본에서 하나의 장르로 불릴만큼 대중적이다. '영화가 아니고 공연에서 저게 된다고?'싶을 정도로 합이 착착 맞는 액션이 극단 신감선 찬바라물의 특장점인데, 이번에도 역시 눈이 즐거웠다.
주인공 '긴지'역의 사오토메 타이치는 어린 시절부터 극단에서 자라 무술, 춤 뭐 하나 빠지지 않게 몸을 잘 쓰는 배우로 유명하다. 함께 출연하는 그의 동생 사오토메 유우키도 마찬가지. 유우키는 긴지에게 원한을 가지고 쫓는 떠돌이 무사로 등장하는데, 특히 <천호성>은 사오토메 형제의 액션 합으로 큰 관심을 모았다. 또 다른 주인공 '한베에' 역의 후루타 아라타는 사오토메 형제가 오랜 시간 동경하며 뒤를 밟아온 찬바라의 대선배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액션을 보여 준 '이부키'역의 야마모토 치히로라는 배우는 3살부터 태극권을 했단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진짜 말 그대로 날아다닌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액션은 감탄을 자아낸다. 귀로는 절반도 못 알아듣지만, 눈을 즐겁게 해주니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show'다. 의미? 예술성? 물론 다 좋지만, 가장 근본은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장르다. 똑같이 무대 위에 올려지는 장르인 '연극'과 차별점이 생기는 부분이다. 때문에 나는 뮤지컬을 쓸 때 늘 '재미'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는 단순히 웃긴 농담, 재미있는 대사가 재미를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일찌감치 깨졌다. 재미는 정말 온갖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상황, 캐릭터, 대사, 춤, 노래, 액션, 뭐 끝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천호성>이 보여준 화려한 눈요기는 서사를 뛰어넘는 재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직관적으로 서사 파악이 가능한 단순 명료한 스토리와 갈등이, 언어를 모르는 나에게까지 재미를 안겨주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말로 이루어진 영화를 보고 재미를 얻었을 뿐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고민과 설찰을 안겨준 작품이다. 나중에 이 작품의 블루레이가 나오고, 혹시라도 한국에 수입된다면 내가 이해한 것과 진짜 이야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