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로 한 날이면 아침 식사를 끝내고 바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이번엔 커피가 마시고 싶어 카페에 들렀다. 일부러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도쿄에 사는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역시 도쿄에서 한국 문화와 문학을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지인이 수술하기 위해 서울로 나왔다는 문자였다. 자궁육종암란다. 의료 기술이 앞선 일본인데 수술을 해 주지 않아 서울까지 왔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명에 한 명 꼴로 코로나에 걸려 있는 상황이라 큰 수술 앞두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없어 문자로만 마음을 보냈다. 부드럽고 따스하지만 강단 있고 대범한 그이인데 응원을 많이 해 달라고 했다. 마침 써서 들고 나온 문장도 ‘죽음’에 관한 것이어서 느티나무 쪽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부디 수술이 잘 되기만을 바랐다.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엔 산수유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냉이와 쑥들 그리고 풀들도 그들의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느티나무는 아직 변화된 모습이 없었다. 느티나무는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나는 나무도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본다.
“어르신, 아직 날이 따스하지 않아도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어요. 어르신도 조금 있으면 연둣빛 싹을 보일 테지요. 그런데 어르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신지요?”
“산수유꽃을 보니 내 마음도 환해지네. 때가 되면 나도 새순을 올릴 걸세. 그런데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몇 백 년을 거뜬히 살아가고 있으니 내가 죽음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 다만 건강해지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 그 덕에 오늘도 이 자리에 서서 새봄을 맞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기대 수명에 대한 우리 부부의 생각은 반대였다. 나는 짧고 굵게, 남편은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나도 이젠 오래 살고 싶어졌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이 실감 나지도 않았고, 건강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가벼이내뱉었을 것이다.
몇 해 전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암 전 단계의세포 변이가 있다면서 전문병원에서 검사받아보라고 했을 때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가장 두려운 건 죽음 자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딸과 남편과의 이별이었고, 딸들에게는 아직 내가 필요하다고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것이다.
문단의 거목이신 박완서 작가도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면 그만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다음 해에 뿌릴 꽃씨를 받는 자신이 측은하다면서,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섭다고 했다. 스무 살에 수녀원에 들어가 많은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셨을 이해인 수녀님조차도 “아무리 아파도 나는 살고 싶었지”라고 하셨다. 나 같은 범인이야 오죽하랴.
후반 인생이 되어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종교인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생이 끝나도 다음 생이 있다는 믿음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덜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육신이 굳어지면 영혼도 바람처럼 흩어져서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내게 죽음은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대상이다.
과학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과학이 증명해 주지 못하는 영역을 잘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신은 물론이고 다음 생이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점을 보러 간 일도 없다. 전생, 환생, 임사체험 등의 일이라면 더더욱 믿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이런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일들을 만났다. 그것들은 내 사고체계를 흔들어 놓기까지 했다. 이는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본 다큐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는 ‘죽음 너머를 읽다’였다. 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인 줄 알고 클릭했는데 뜻밖에도 90년대 생 청년이 망자를 만나 소통하는 이야기였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 영매 청년 타일러 헨리를 만나려는 대기자는 30만 명이나 되었다. 타일러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의뢰인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는데 전날이나 이동하는 상태에서 그들의 성별이나 인원, 특이 사항,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 등에 대한 감을 받기도 했다. 그는 특별한 차림이나 절차도 없이 노트에다 펜으로 선을 계속 긋는데 예사롭지 않은 눈동자로 집중하면서 망자가 전한 내용을 의뢰인에게 전해주었다. 망자의 취향, 인상, 숫자, 알파벳, 사망 원인 및 상태 등이다.
나처럼 타일러를 실험해 보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용을 그에게 전해 들으면서 놀라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망자가 떠난 뒤 유족이 종종 하는 말이나 특별한 이름 등에 대한 것들을 타일러에게 듣게 되는 그들은 소름 돋을 정도로 경악해했다. 타일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유족이 마음의 평화를 얻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갑작스레 떠난 망자들이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의뢰인들은 비로소 눈물 흘리며 위안을 받는다. 여러 의뢰인들과 만나 리딩하는 에피소드를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연출이나 속임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의뢰인들 가운데 정의로운 이가 없겠는가. 그러니 볼수록 빠져들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일이라 단정하고 있던 환생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이 역시 넷플릭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로 보았다. 미국엔 환생에 대한 연구가 오래전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다. 연구자에 의하면 환생은 6~7세까지 기억할 수 있는데 부모가 부정하게 되면 기억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아이가 말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검색을 해서 그 내용이 사실인 것을 알고 연구소에 연락해 꾸준히 기록하게 된 경우들이 있었다. 반복적으로 자신이 누구이며, 부모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는 꼬마의 이야기가 사실과 일치했다.
전생에 헐리우드 영화배우라고 말하는 꼬마 아이는 아내의 이름과 자신이 일하던 곳, 출연한 영화 등을 정확히 말했다. 학자가 그 배우에 대해 알아내어 60가지 질문지를 만들었는데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실제 자녀도 아니라고 했던 내용들도 알고 보니 대부분 맞았다. 그 가족을 처음 만난 아이는 너무 편안해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으나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알 수 없는 정보와 지명, 이름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아이들이 밤이면 고통스럽게 울어대고, 툭툭 내뱉는 말들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걸 부모들이 놓치지 않았기에 알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임사 체험 다큐멘터리 역시 알고리즘으로 보게 되었다. 임사 체험자들의 모임도 있었는데 그들이 체험한 일을 믿지 않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치유 모임이었다. 그동안 나도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내용이 정말로 죽은 자의 기억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가 의문이었다. 환상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정지가 된 상태에서는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죽어서 보았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차원이 무너지고 꽃과 아름다운 강이 나타나고 이미 떠난 자신의 유족들을 만나기도 했다. 수술 중에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이 위에서 지켜보았다는 이야기는 수술을 집도한 이들을 놀라게 했다. 마취가 되어 있는 환자였음에도 되살아난 후에 그려낸 그림에는 수술에 참여한 이들의 위치와 도구 등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어찌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듯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고 어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영매와의 소통, 전생, 임사 체험에 관한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고 나자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절대 얼토당토한 일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게 되자 죽어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생기고 죽음도 예전처럼 두렵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타일러에게 의뢰하고 싶다.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 떠난 큰언니가 아버지와 만나 잘 지내고 있는지, 50대에 떠나신 아버지는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