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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May 06. 2024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지

만약 여러분의 부모님 중 한 분 혹은 두 분 모두, 돈을 잘 못 버는 무능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며 매일 부모 잘못 만난 탓을 하며 인생을 낭비하게 될까요? 그런데 부모가 무능하지만 그래도 각자 당신들이 즐거운 소소한 일들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늘 웃음을 보여주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 생활을 위해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그 때에도 부모 잘못 만난 탓을 하며 인생을 비관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채 게으르게 살게 될까요?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을 유지해준 부모님께 나중에라도 감사하지 않을까요?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가난해도 행복한 가정을 유지해준 부모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들이셨는지를 깨달으며 복받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요? 


부모가 아이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실은 가스라이팅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책임져줄 수 없죠. 여기서 말하는 타인은 당연히 자식들도 포함 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태어난 이후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난 이후라면 그 때부터 자신의 삶은 스스로 책임을 질 운명을 타고 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만 이미 태어난 이상 나의 인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라는 점이 그렇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에서 부모의 기대를 거스르다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현실에서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그 청년의 아버지가 잘못한 일은, 아이의 인생에 쓸데없는 책임감을 갖고 간섭하는 바람에 아이가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기회를 박탈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아버지는 아이가 잘되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강요했을 거고, 그렇게 잘되라는 마음 한구석엔 자기가 책임지고 아이를 훌륭한 인물로 키우고자 하는 순수한 바램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바램이 아무리 순수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이에겐 부담이자 폭력이 될 수 있는 거죠.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자살한 그 청년이 연극에 몰두하고 연극 배우로 살다 힘들고 가난한 배우의 삶을 살게 되더라도, 그 책임은 그 청년 본인이 지는 거고 그것이 그 청년이 감당해야 할 스스로의 운명인 거겠죠. 그 청년의 인생이 현실적으로 힘들게 전개된다 한들, 아무리 부모라도 그 청년의 인생을 대신 책임 져 줄 수 없는 겁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돈을 잘 벌든 못 벌든, 스스로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줄 수 있고, 그래야 가족 관계도 화목하게 유지하고 아이들에게도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는 거죠. 물론 부모가 능력도 있고 행복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아이 입장에서 그건 그냥 '아쉬운 바램' 정도로 끝날 뿐입니다. 


남들은 절대로 한 가족의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가정의 부모가 무능력하거나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해서, 그 누구도 그 가족의 부모에게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고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 집이 어떻게 살지는 전적으로 그 가족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가족의 행복을 위해 돈 외에 다른 더 중요한 가치가 필요할지 어떨지 외부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는 재벌이었습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두 형은 끝내 자살했죠. 유능한 아버지가 비트겐슈타인의 두 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서였을까요? 경제적으로도 풍요를 제공하고, 어쩌면 아버지의 사업에 두 형을 참여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 두 형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했던 겁니다. 


세상엔 부모 없이 자라서도 훌륭한 사람이 된 인물들이 많습니다. 류승범 배우, 류승완 감독도 어릴때 부모가 돌아가셨죠. 멀리는 카뮈, 에드가 엘런 포우, 단테,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모두 일찍부터 부모가 없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아버지는 두 살 때 이혼한 이후 죽기 전까지 오바마를 단 한 번밖에 보지 않았죠. 오프라 윈프리는 사생아로 자랐구요. 부모 모두 혹은 한 쪽이 일찍부터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들 모두에게 이른 시기부터 결핍을 낳아 이들이 성공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의 인생을 절대로 책임져줄 수 없고, 책임져 주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인생의 본질에도 위배되는 행위죠. 인생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만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본질이니까요. 앞으로 아이를 낳을 분들, 혹은 아이가 있는 분들도 이 아이의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그것이 본인에게도, 혹은 아이에게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지금 한국에서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에 수많은 아이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의 병을 가진 채 쓸데 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과연 그렇게 부모가 과도한 책임감으로 키운 아이들이 나중에 자기 인생을 잘 꾸려 나갈 수 있을까요. 


부모는 그냥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것만 되어도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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