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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맘대로 Jun 23. 2024

공감의 역설

공감 과잉의 문제

한동안 언론에서 ‘공감’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들이 인기를 얻었죠. 아이가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기 위해 부모와 주변 사람들의 공감이 필요하다든가, 친구 관계에서나 연인 관계에선 논리보다 감정적으로 공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든가 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서로 기쁨과 슬픔을 공감해주는 능력이 논리적인 지능보다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죠.


물론 공감은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고 사람들이 서로 정서적 교류를 통해 감정을 나누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겠죠. 공감 능력이 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구요. 그런데 공감 만능주의는 자칫 매우 큰 문제를 덮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최근 초등학교에서 교사가 아이들에게 공감을 못해준다고 학부모들이 난리를 피거나 직장에서 공감의 문제로 구성원 간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은 공감을 원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의향이 있을 때맏 상대가 편하게 공감해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공감을 바라는 상대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공감 그 자체일때 상대도 자연스럽게 공감해줄 수 있습니다. 공감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놓치기 때문에, 공감을 원했는데 상대가 전혀 공감해주지 않는 경우를 겪고 불만을 토로하곤 합니다. 공감해주는 사람은, 공감을 바라는 사람이 진실된 마음으로 공감을 원할 때 자연스럽게 별 노력하지 않아도 공감해줄 수 있다는 의미죠.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자기 자랑을 한다고 합시다. 자기 자랑을 하는 마음의 근원에는 언뜻 보아 상대방이 나를 추켜세워주길 바라고 상대에게 칭찬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의도라면, 상대방도 기분좋게 공감해주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서로가 가진 욕구와 의도를 금방 눈치 챕니다. 친한 사이일수록 더 그렇죠.


하지만 그런 마음 보다는 허전한 내 마음을 상대의 인정으로 풀거나, 상대에게 질투심을 유발해서 내 마음을 채우려는 의도를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내 자랑을 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모를까요? 그런 경우 상대방이 내게 전혀 공감을 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상대방도 왜 자연스럽게 공감이 잘 안되는지 본인도 모릅니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내 의도를 상대방이 읽은 거고, 그래서 공감이 어려운 거죠. 


그리고 공감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아무리 공감을 받아도 해소가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근원적인 외로움은 남들의 공감을 통해 해소가 어렵기 때문에, 자기 외로움에 대해 공감해 달라고 하소연해도 상대방 입장에서 공감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로움은 결국 타인으로 해소가 안된다는 걸 상대방도 알기 때문이구요. 내 일이 안되서 짜증나는 걸 공감해 달라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까지일 뿐입니다. 결국은 그 안되는 일을 포기하든가, 짜증나더라도 고독하게 밀고 나가서 해결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상대방도 알죠. 


공감으로 개인의 감정을 해소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엔 한계가 있고, 그래서 공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굉장히 피곤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공감과 관련해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점이 있는데요.


바로, 서로 감정적 공감으로 연결된 집단은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때 감정적으로 연결된 집단을 내집단이라 하고 그 바깥을 외집단이라 부를 수 있는데, 내집단 구성원들이 서로 감정적 공감으로 연결된 정도가 클수록, 외집단에 대한 거부감과 반발, 배타적인 태도는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인류사 내내 끊이지 않았던 다른 종교,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과 갈등입니다. 11세기부터 2백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도 그렇고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수많은 갈등, 지금도 계속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 부분을 특히 주의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려진대로 히틀러와 괴벨스 등 당시 나치 일당과 독일군, 그리고 유대인 박해에 찬성했던 독일 국민들은 전혀 싸이코패스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히틀러와 괴벨스는 예술적 감각도 갖추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설의 대가였죠. 독일군과 독일 국민들은 나치를 통해 감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강력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내집단인 나치와 독일 국민들은 외집단인 유대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척하고 학살할 수 있었죠. 전쟁이 끝나고 독일 전범들을 재판하는 과정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류 최악의 살인마로 둔갑한 이 현상을 보고 ‘악의 평범성’ 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맘카페 회원들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가게들을 공격한다든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이 남자 혐오성 글과 이미지를 퍼뜨리는 것, 난민을 비롯해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것,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 집단에 매몰되어 의견이 다른 정당 지지자들을 배척하는 것 모두 공감으로 뭉친 내집단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진 성향이나 성격 특성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좋거나 나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공감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무조건 공감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도 모르게 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을 안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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