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동 Jun 19. 2024

육중한 활자의 성벽


객관적 의미의 벽돌책을 생각해 본다. 벽돌의 두께는 6㎝.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 6㎝라는 게 참 애매하다. 5.9㎝는 일반 책이고, 6.1㎝는 벽돌 책이라고 구분하는 건 뭔가 부자연스럽다. 그럼 페이지로 정하는 게 좋을까. 6㎝를 충족시키려면, 아무리 못해도 천 페이지는 넘어야 한다. 천 페이지의 육중한 활자의 무게를 지탱하려면 하드케이스는 필수이므로, 책 자체의 질량이 계속 증가한다. 결국, 벽돌책으로 귀결된다. 이 정도가 되면 폭력적인 사람에게는 무기가 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베개가 된다.


주관적 의미의 벽돌책을 생각해 본다. 겉보기에 볼품없는 책이 있다. 잘 못 먹어서 그런지 뼈만 남아 앙상하다. 몇십 페이지나 백 페이지를 간신히 넘는 책. 뚱뚱한 책들 사이에 간신히 몸을 비집고 들어간 참으로 비루한 자태. 그러나 아주 가끔 우주가 담긴 책을 발견하게 된다. 크기가 영으로 수렴하여 무한에 가까운 밀도를 가지게 된 블랙홀처럼, 이런 책들은 분량은 적지만, 한없이 무거워 밀도가 무한으로 뻗어 나간다. 어느 남자가 신선들의 바둑을 구경하다가 마을로 돌아오니 수백 년이 지나 있었다는 이야기처럼, 이런 책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들고 전혀 다른 세상에 다녀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런 벽돌책에 매료됐다. 거친 질감과 둔탁함. 근육을 적절히 자극하는 무게감. 물리적 형상이든 정신적 생각이든. 벽돌책은 나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자극은 이질적인 것의 침투. 침투는 반응을 낳고 반응은 새로움으로 이끈다. 나는 분명 의자에 앉아 눈앞에 있는 벽돌책을 보고 있었건만, 나의 정신은 시각을 왜곡하여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지금 보이는 건 육중한 활자의 성벽.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성문 없는 활자의 성벽에 갇혔다.


성벽은 방어를 위한 것.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활자의 성벽은 특별하다. 벽돌책에 담긴 활자. 활자에 담긴 사유가 나의 사유와 충돌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붕괴하면서 만들어지고 만들어지면서 붕괴하는 일종의 ‘산일구조’이다. 불이 타오르면서 변하더라도 ‘불’ 자체의 모습은 유지되는 것처럼. 이 특별한 성벽은 나의 피부이기도 하다. 피부는 비록 내부에서 표피와 내피 사이의 전쟁을 벌이지만, 피부 밖 이물질이 체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피부는 전쟁을 치르며 굳은살로 변한다.


성벽 또한 마찬가지다. 활자에 담긴 생각과 내 생각이 격돌하면서 서로에게 상처가 생기고, 서로에게 영향받는다. 전쟁의 역사를 보라.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적군과 아군은 전략, 전술, 무기체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간다. 생각과 생각이 충돌하는 현장 또한 마찬가지. 서로 다른 것들의 치열한 투쟁은 성벽에도 굳은살을 만든다. 성벽의 폭이 점차 두꺼워지는 메커니즘. 문득 의문이 든다. 문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출입구 없는 성에 가둬둔 것일까.


자연스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마음의 성채를 떠올린다. 내면의 피난처. 난공불락의 요새. 그러나 이곳엔 활자의 성벽과 달리 성문이 있다. 성문의 존재로 인해 성채는 비로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된다. 마음이 부대낄 때, 기분이 소란스러울 때, 이유 모를 감정이 엄습할 때 나를 온전히 품어주는 성채이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 소진된 기력이 회복되면, 성문을 열고 나오면 된다. 이보다 더 평화롭고 한적한 피신처는 없다.


활자의 성벽이 마음의 성채로 기능할 수 있을까. 차이는 성문의 유무에 있지만, 활자의 성벽에 성문을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활자의 성벽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마음의 성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활자의 성벽은 생각과 적아가 불분명하고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전장. 마음의 성채는 적과 아군이 선명하게 구별되고 개전과 종전이 분명한 전장. 이는 마치 현대전쟁과 19세기 전쟁의 차이와 같다.


성문을 만들 수 없으니 전장을 옮기기로 한다. 격돌의 장소를 성벽이 아닌 나의 내면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만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내 몸은 너무나 맑고 투명한 데다 형체가 없어서, 저자의 사유를 쉽게 투과시키기 때문에. 삼켜지지 않고 제대로 충돌하려면 나를 불투명하게 덧칠하고, 형체를 주조하여 단단하게 보강해야 한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활자의 성벽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저자의 사유는 무자비하게 쇄도해서 나의 내면과 충돌한다. 내면은 성벽이 되고, 굳은살의 논리에 따라 내면이 두꺼워진다. 점점 버티기 수월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은, 아니 내면은 두꺼워지므로. 확장된 내면의 폭이 마음의 성채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치열한 전쟁은 계속되고. 어느 순간, 활자의 성벽이나 마음의 성채가 없어도 버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 스스로 벽돌책을 닮은 육중한 성벽이 되었으므로.

작가의 이전글 고장 난 번역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