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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l 01. 2024

손 끝에 걸린 달


“달이 뚱뚱해졌어. 곧 엄마가 될 건가 봐.”


불현듯 들려오는 딸의 외침에 흐느적거리며 뒤따라가던 나는 하늘을 본다. 노란 그믐달이 날 보며 웃고 있다. 아니 초승달이었던가. 매번 헷갈린다. 헷갈림의 정도만큼 무심했음을 체감한다. 솔직히 인정한다. 달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것을 넘어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분명 감정불구다.


몇 걸음 앞. 아내와 딸이 손을 잡고 걸으며 재재거린다. 딸의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엄마의 배를 번갈아 가리킨다. 딸의 손가락 끝에는 생명이 대롱대롱 매달려있건만, 나는 보지 못한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란 고사가 딱 내 꼴이다. 손가락을 들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것과 다를게 뭔가.


딸은 매번 나의 허를 찌른다.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습을 한다. 민첩한 레지스탕스이자 날카로운 송곳이다. 내가 나태해질 만하면 어디선가 조용히 나타나 깨달음이 담긴 바늘을 쏘아대는 딸. 변화를 이끌어 내는 사람을 일컬어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 딸은 스승이다. 나보다 한참을 늦게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한참을 더 살아온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아빠에게 아이는 스승이다. 아이를 통해 온갖 희로애락을 겪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느껴지는 장엄한 희열. 아이가 잠을 안 자고 놀아달라며 보챌 때 느껴지는 분노와 죄책감의 양가감정. 책을 읽어주다가 뜬금없이 맞이하는 철학적 질문들. 아이가 심하게 아플 때마다 아빠에게 느껴지는 강렬한 고통. 아이가 없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모든 감정에서 깨달음이 파생되는 법이다.


아이가 없는 삶을 생각한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 평온하고, 평화롭고, 평안한 삶이다. 위기가 없는 삶. 투쟁이 부재한 삶. 영원히 얼어버린 삶. 이곳에서는 생각도 멈추고 행동도 멈춘다. 그러므로 죽음이다. 아마 내 딸이 없었더라면 나는 움직이는 시체처럼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리라. 이런 생각은 아이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하나의 존재란 언제나 그 이면에 부재의 존재를 품고 있으므로. 존재와 부재는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그렇기에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는 이런 생각이 피어나지 않는다. 부재가 존재에 앞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며 아이의 존재는 점차 선명해진다. 흑백 스케치에 색채를 입히듯.


그러므로 생생하게 실존하는 아이란 꽝꽝 얼어버린 아빠를 부수는 파쇄기다. 강렬한 힘으로 얼어버린 아빠의 삶에 균열을 만든다. 그리고 침투한다. 차가운 피가 흐르는 아빠의 혈관에 태양을 품고 있는 아이의 피가 흘러든다. 물에 잉크를 떨어뜨렸을 때 검정 빛이 확산하듯. 아빠의 몸에도 펄떡이는 생동감이 깃든다. 딸이 아빠의 머릿속 수도꼭지를 틀었다. 오래전 잠가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동안 막혀있었음에 복수라도 하듯 쏟아져 내린다.


나는 피부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느끼며 사람의 일생에도 밀도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딸은 탄생에 가까우므로 밀도가 높고, 아빠는 죽음에 가까우므로 밀도가 낮다. 아빠만 있었더라면 밀도가 점점 낮아져서 결국 흐릿하게 사라졌을 텐데, 딸의 밀도 덕분에 아빠의 밀도는 채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딸은 구원이다. 양철기사인 아빠의 텅 빈 가슴에 따뜻한 심장을 넣어준 나의 구세주.


엄마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잉크처럼 번지는 따뜻한 미소. 딸의 팔이 들어 올려지고. 손가락 끝이 나를 향한다. 뭉툭한 아빠지만 이번에는 알아챈다. 손가락 끝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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