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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n 17. 2024

고장 난 번역기


첫 마음이라. 단박에 떠오른 장면은 딸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눈은 감겨있고, 입은 연신 오물거리는 모습이 뭐랄까. 예쁘다기보다는 낯설었다. 그건 애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인식의 문제였던 것 같다. 미추를 떠나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는 무언가를 볼 때 느끼는 그런 감정. 장엄한 풍경을 마주한 사람이 그러하듯, 형용할 말을 찾지 못해 그저 물끄러미 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장착된 오감이 전력으로 아기를 지향하고 있는 느낌. 아기의 솜털에 맺힌 습기까지 감각할 정도였다. 드디어 아기의 입이 열린다.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아기의 입술이 미세한 떨림을 보이려는 순간 나는 알아채고야 말았다. 아기의 첫 의지가 성대를 통과하고 있음을.


나는 “응애”란 소리를 들으며 “아빠 사랑해”란 말을 상상한다. 인간의 청력이 이렇게 매정하다. 한 번쯤은 상상을 따라가 줬으면 하지만 매번 기대를 배신한다. 아기는 계속 “응애”를 외치고 있지만, 내 머릿속의 번역기는 제멋대로 해석한다. 머릿속을 맴도는 “아빠 만나서 반가워” 같은 문장은 어디에서 비롯해 된 걸까. 번역기가 고장 났음이 확실하다. 무언가 머릿속 체계가 헝클어졌다. 전자기기가 강력한 자장에 휩싸이면 망가지는 것처럼. 나는 나의 존재를 뒤흔드는 무언가 접촉하고야 말았다. 이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 과정. 나는 정확히 2020년 3월 13일 오후 1시쯤, 카이사르가 지나간 루비콘강을 건너갔다. 그렇게 우주의 법칙은 다시 쓰였다. 딸은 태양. 나는 지구로.

   

그로부터 50개월이 지났다. 태양이 종종 지구 자기장을 교란하듯. 그동안 딸은 내게 끊임없이 양가감정을 일으켰다. 몸이 너무 피곤해서 쉬고 있는데, 끝없이 놀아달라고 하는 딸. 잠자리에 들어가 수십 페이지 책 10권을 읽어달라고 하는 딸. 팔꿈치 뜯기 애착이 심해 아빠 팔꿈치를 피가 날 정도로 긁어대는 딸. 밥 먹기 싫다고. 양치하기 싫다고. 떼를 쓰는 딸. 이런 상황이 생기면 어느 정도 달래주다가 화를 내고야 만다. 그러면 반드시 죄책감에 빠진다.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나는 왜 딸에게 화를 냈을까. 끝없이 번민한다.


이렇게 지독한 양가감정이라니. 그럴 때면 내 자아가 둘로 분열된 것은 아닐지 상상한다. 애정을 가진 나. 화를 내는 나. 이들은 북극과 남극의 거리만큼이나마 떨어져 있지만, 나는 놀랍게도 그 거리를 손쉽게 오간다. 초음속 비행기라도 이럴 수는 없을 텐데. 감정의 진자운동은 물리 법칙을 손쉽게 초월해 버린다. 4년 넘게 북극과 남극을 쉬지 않고 오가는 과정. 문득 중요한 무언가가 마모된 기분이 들었다. 놀아줄 때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휴대전화 화면만 보고 있는 내 모습. 침대에 누워 책 읽어줄 때 재미없게 읽어주는 내 모습. 그런 한심한 모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깎여 나간 무언가가 선명해졌다. 그건 “응애”였다. 내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내가 들었던 딸의 “응애” 소리가 지워지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소리와 함께 머릿속 고장 난 번역기가 애써 번역해 준 “아빠 사랑해” 또한 사라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공포가 밀려들었다.

   

‘첫 마음’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런 미증유의 공포는 아빠를 절실하게 만드는 법이다. 시간이 없다. 나는 고민 끝에 ‘애정을 가진 나’와 ‘화를 내는 나’라는 갈림길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길 포기했다. 대신 북극과 남극을 오가는 초음속 비행기가 되기로 했다. 물론 끊임없이 흔들릴 테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화도 낼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빠른 속도로 양쪽을 오가면서 발바닥에 땀이 나는 쪽이. 마모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딸의 손을 잡고 놀이터에 간다. 기분이 좋아진 딸이 말한다. “아빠 사랑해”. 머릿속 번역기가 아직 고쳐지지 않았나 보다. 지금 내 귀에 “응애” 소리가 들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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