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유동 Jun 12. 2024

김육(金堉)의 이메일

제31회 평택사랑 전국 백일장 공모전 '차상' 수상작


  몸이 아파서 휴직했다. 회복의 기약은 없다. 좀 더 천천히 나빠지기만을 바랄 뿐. 궤도에서 이탈한 인공위성이 제 위치로 돌아가기 어렵듯이, 나 또한 자연스럽게 퇴직을 결심했다. 결정은 빨랐지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내 삶에 축적된 세월의 두께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일했다. 문제를 근본까지 파고들어서 해결했을 때에 느껴지는 희열, 고민해서 추진한 일로 도움받은 사람들이 감사의 표현을 할 때 느껴지는 보람.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의 외피(外皮)가 되었다. 아름드리나무가 나이테를 통해 한해 한해 삶을 살아낸 흔적을 보존하듯이, 나에게도 그런 나이테가 있었다. 앞날을 보장해 주는 휘황찬란한 나이테. 그런 갑옷을 벗어던지는 결정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사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런 결정은 정말 중대한 무언가와 대치되어야만 가능한 일. 예를 들어 삶과 죽음 같은 것들.


  직장 상사에게 퇴직의향을 밝히는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났다. 이미 내 마음속 결정이 오랜 기간 숙성된 탓일까. 아니면 내 표정에서 드러나는 확실한 의지를 상사가 읽은 탓일까. 이유야 무엇이 되었든, 나는 나 스스로 그동안 나를 보호해 왔던 껍질을 벗어던졌다. 이것은 강요 아닌 강요. 수명과 일, 둘 중에 무엇을 택하겠냐고 묻는 양자택일의 상황. 직장은 나에게 그만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삶이 나에게 그만두라고 명령한다. 지금 그렇게 일을 계속해 나간다면, 장차 딸의 결혼식에 입장하지 못하게 될 거라고. 이런 상황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한번 결정하면 뒤돌아서서 후회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이 직업적인 측면에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지만, 현 상황에서도 유용한 것 같다. 직장상사와 이야기를 마친 후, 사무실을 돌아나가면서 바로 이런 생각을 했다. ‘가족을 위해 가능하면 오래 살아야지. 야근하지 않고, 수입도 괜찮은 일을 찾아보자’ 생각해 보니 좀 우스우면서 슬프다. 여전히 직업적인 관성에 사로잡혀 있어서, 목표를 설정하고 방법을 찾고자 하는 ‘내 의지’가 안쓰럽다. 한편으로 ‘직(職)’이란 외투를 벗어던져도 내가 가진 고유한 ‘의지’는 남아 있음에 안도한다.

 

  개인의 역사에서 일어나는 중대한 변곡점도 ‘사건’이라 부를 수 있다면, 퇴직의 결심이란 '사건'을 거치고 내 마음에 어떤 눈이 생겼다. 그것은 나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눈. 마치 이인증(離人症)을 겪는 사람처럼. 종종 나 자신의 환경에서 분리된 느낌을 겪는다. 그런 상태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타자, 그리고 배경 또한 객관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나에게 세상은 직소 퍼즐이다. 1,000조각의 퍼즐이 완전히 맞춰진 상태. 이것은 모든 형태가 분명해지고, 그 자체로 영속성이 느껴지는 안정감 있는 모습이다. 나는 그중 1개의 조각이고, 틀 안에서 다른 조각들과의 관계 속에 안온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모양이 달라졌다. 그것으로 형태는 어그러지고, 틀은 붕괴 한다. 한편 나에게 세상은 기계다. 모든 부품이 완벽하게 맞춰진 상태. 나는 그중 1개의 부품이다. 나는 기계의 부품으로 잘 작동하다가, 끊임없이 마모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것으로 알고리즘은 틀어지고, 기계는 작동을 멈춘다.

     

  나는 직소 퍼즐 한 조각, 부품 한 개의 마음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갑자기 닥친 비극을 애도하며 심호흡을 한다. 문득 내 주변의 변고(變故)가 감지된다. 숨 쉴 때 들이마시는 공기가 유난히 까끌까끌하다. 바람에 날려 펄럭이는 옷자락은 나의 섣부름을 질책하듯 정강이를 때린다. 대기는 소리 없는 비난의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내 세상은 방독면 없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다.

      

  도시는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그곳에서는 일과 돈이 뭉쳐진 욕망의 연기가 초 단위로 뿜어져 나온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 안에는 생존이 가능한 순환체계가 가동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손상되면서 동시에 회복된다. 반면 산에는 먹구름이 없다. 당연히 특별한 순환체계가 필요하지 않다. 퇴직한 사람들이나 궁지에 빠진 사람들이 산에 가는 이유다. 하지만 나에게는 문제가 있다. 산에만 다니기에는 젊다는 것. 그리고 나와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사는 장소가 ‘도시’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이 특별한 상황은 나에게 특별한 대책을 요구한다.

       

  조급해진 나는 산꼭대기에 올라 고민한다. 나아가지 못한 채 걱정만 거듭한다. 방법을 찾지 못한 마음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한다. 나는 그렇게 이름 모를 길 위에 못 박혔다. 그러다 우연히 평택에 위치한 ‘대동법 시행 기념비’를 보았다. 조선 시대 조세제도의 혁신을 기념한 비석. 사실 자체도 대단한 일이지만, 나는 다른 것이 보인다. 나는 돌로 만들어진 유형(有形)의 비석을 보며 무형(無形)의 노력을 본다. 김육(金堉)의 열정은 백성의 무심(無心)을 기어이 유심(有心)으로 돌려놓았다. 한 인간이 만들어 낸 심대한 변화가 비석에 새겨지고, 비석은 나의 마음을 뒤흔든다.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바꾸기도 어려울진대, 변화의 대상이 한 국가를 움직이는 제도라면. 그 저항은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의 크기가 된다. 아마도 김육은 끊임없이 실패했으리라. 실패하고 또 실패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과정에서 그는 분명 고립됐으리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의 생존을 바라지 않는 상황. 그는 지금의 나와 분명 닮았다.

    

  그러므로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나에게 편지다.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이메일이기도 하다. 우둘투둘한 비석의 표면은 글자가 되어 나에게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인간의 삶이란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며 말없이 격려한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어떤 계곡을 건너는 ‘과정’에 있음을. 지금 여기에서 내 발은 계속 움직이고 있음을. 느리지만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음을 감각한다. 어떤 환희가 조용히 몸 안에 퍼져나간다. 나는 그렇게 김육(金堉)을 생각한다. 그의 얼굴은 포기를 모르는 ‘시시포스’를 닮았다.

이전 15화 글쟁이의 희망사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