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31일. 인하대 건축왕 김 모 씨
2023년 3월 31일 금요일 아침. 동생과 동네 카페에 갔다. 늦장 부리는 동생이 답답해서 먼저 집을 나섰고, 집을 나서자마자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깜박한 스탬프 10개를 채운 쿠폰이 떠올랐고, 다시 올라가기 귀찮아 동생에게 쿠폰을 챙기라고 전화했다. 카페에 도착해 알바생에게 곧 올 동생이 같이 결제하겠다고 했고, 곧 도착한 동생은 쿠폰으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오후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 때문에 바쁘다는 동생을 약 올렸다. 짜증 난 동생은 제발 꺼지라며 아예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부동산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2년 전세 계약이 끝났지만, 다음 세입자가 구해져야 보증금을 되돌려줄 수 있다는 집주인에게 '다음 세입자가 구해질 때까지만 있겠다'고 해놓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전화 자체는 이상할 게 없었고, 오히려 반가웠다.
그런데, 전화 너머로 들리는 말은 "(동생 이름)학생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요" 중개인은 구구절절한 서론없이 바로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중개인은 엄마와 동생이 놀랄까 봐 나에게 먼저 연락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근방에 인하대 교수의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서 우리 건물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여기도 넘어가 있더라. 다음 주에 법원에서 경매장이 날아올 테니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개인이 착각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3일 전 집주인과 통화했을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으니까.
대학가 특성상 학기 중에는 세입자가 잘 안 구해져 최소 한 학기는 더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당근에서 2층 침대를 예약했고, 집주인에게 기존 침대를 빼달라고 요청했다. 집주인은 흔쾌히 수락했고, 1층에 내려놓으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이게 불과 3일 전의 통화였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지금 집주인과 통화가 안된다. 다른 세입자들과도 통화가 안된다더라. 나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집주인 때문에 미치겠다'며 동동거렸다. 3일 전까지만 해도 집주인과 통화를 했다고 대답하자, 집주인과 연락되면 자신에게도 알려달라며 부탁했다.
중개인과 전화를 끊고, 눈앞에 놓인 노트북에 '전세 경매'를 검색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건 대부분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겪는 단계로, 처음 보는 내용도 아니었다. 요즘 워낙 이슈인지라,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익숙한 내용들이 잘 읽히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의 바로 전화를 받았다. 받지 않을 거라 예상했기에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집주인은 은행에 이자가 두세달 밀렸지만 곧 이자를 상환해서 경매를 철회할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나는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집주인이 이자를 곧 상환하겠다는데, 더 이상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생에게 우리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고 대답했다. 불안증과 강박장애가 있는 동생은 전세 사기에 대한 걱정도 많았기에 단번에 이 상황을 이해했다. 동생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출근 전 날씨 좋은 오전의 커피를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원래 그러기로 돼있었으니까. 아직 반도 마시지 못한 커피가 아까워서 동생에게 성질을 냈다.
'집주인이 곧 이자 상환할 거니까 기다려보래잖아.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카페에서 나를 끄집어낸 동생과 동사무소에 가서 등본과 확정일자 확인 발급서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출근을 했고, 동생은 곧장 부동산으로 향했다. 18000원짜리 비타500 한박스를 사 들고서.
출근길에 엄마와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 경매 사실을 알렸다. 일을 하고 있던 엄마와 여동생은 무덤덤했다. 부동산중개업자의 전화를 받은 나처럼. 나는 전화 너머로 동동거렸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그랬던 것처럼.
학원에 도착했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풍경이었다. 속이 계속 간질거렸고 손이 쫌 떨리긴 했지만, 평소처럼 행동했다. 공강시간에 우리 반 아이가 원어민 수업 중에 장난을 치다가 손등을 다쳤다. 원어민 선생님의 요청으로 싸운 두 아이를 불러내어 혼을 낸 후, 서글피 우는 아이를 꼭 안아 달래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꺼이꺼이 숨이 넘어가듯 울었다. 서러움과 울분에 사로잡힌 아이의 작은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 진동이 내 몸에 전해지자 나도 같이 울고 싶어졌다.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지만 무사히 수업을 마쳤고,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으며 꽃과 날씨 이야기를 했다. 퇴근하면서 다른 선생님들께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소식을 알렸다. 지금의 내 나이에 이 학원을 창업한 원장님은 창업초 천만 원대의 보험사기를 당한 경험을 들려주며 나를 공감하고 위로했다. 그리고는 그 돈 기부했다는 게 마음 편하다며, 괜히 너무 악쓰지 말라고, 그럴수록 나만 손해라며 조언했다. 진심 어린 위로였지만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퇴근을 하며, 주말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몇 주 전부터 잡혀있던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는 무례한 행동을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한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 동생은 하루종일 열심히 찾은 권리 분석을 늘어놓았다. (이게 가능한 줄 알았으면 진작 해봤을 텐데) 부동산 계약서만 있으면 건물 전체의 확정일자를 열람할 수 있다. 동사무소에서 최근 4년 확정일자를 모두 떼 온 동생은 13 가구 중 최근 4년 이내 계약된 전세가 총 9 채이며(이 건물에 전세가 최소 9개 이상이란 뜻이다), 확정일자 순으로 우리가 6순위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근저당이 좀 있긴 했어도 전세가 2개뿐이라는 확인을 받고 전세로 들어왔는데, 동생이 집을 계약한 당시 이미 전세가 6개였다. 이는 사실상 최우선 변제를 제외한 배당금은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상황 판단은 끝났다. 집주인이 은행에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자 근저당권이 있는 은행에서 경매를 걸었고, 때문에 보증금 5000만 원 중 우리가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은 최우선변제금액뿐이라는 것. 현재 부동산 현황과 이 건물이 부실매물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최대금인 2700만 원을 다 받기도 힘들 거란 것. 그날 밤 몇 천 원 아끼려고 참았던 커피와 아이스크림, 트윅스를 잔뜩 사먹고는 몽땅 게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