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이해되는 엄마의 마음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이해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서 예전에 입던 교복이 생각나서 엄마한테 물어보았을 때 엄마는 형편이 어려워서 교복을 사지 못한 다른 아이한테 교복을 주었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비싼 학원을 다녀가면서 외고에 들어갔다. 그래서 외고 다니는 아이들은 다 돈 많은 부유한 혹은 교복은 당연하게 살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집 아이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리고 궁금했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아이를 알고 찾아서 내 교복을 물려줬을까?
전라도 산속 시골에서 태어난 엄마는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다고 했다. 엄마는 시골 깡촌에서 두 오빠를 위로 두고 맏딸로 태어나서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오빠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닐 때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해야 했다. 어렸을 때 엄마가 가끔 얘기했다. 본인도 오빠들처럼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받았으면 지금처럼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엄마는 정말 머리가 좋고 무엇이든 금방 배우고 잘하면서 손도 빠르고 생각도 깊은 사려 깊은 사람이다. 나도 엄마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좋은 학교를 나오고 교육을 많이 받았으면 좋은 회사를 다니면서 원하는 멋진 일을 하며 살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그 대신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내가 원하는 교육을 다 받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내가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내가 일찍 결혼하기를 바랐던 아빠는 여자가 대학원까지 나오면 결혼하기 힘들다면서 대학원 진학을 반대했다. 그런 아빠를 밤새 설득해서 내가 가고 싶은 대학원에 가게 해 준 게 엄마였다. 엄마는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이 평생 후회된다며 나에게 원하는 공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라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다.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당연히 그런 존재였다.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해결해 주고 언제나 도와주는 사람. 고삼 때 내가 원하는 문제집을 말하면 엄마는 동네 서점을 다 다녀가면서 구해줬다. 수능을 몇 달 안 남기고 내가 수학이 힘들다고 과외 선생님을 구해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내가 다니던 학원 수학 선생님을 과외선생님으로 구해줬다. 엄마가 어떻게 쇼부를 쳤는지 모르겠지만 수능을 네 달 남기고 나는 잘 나가는 학원 수학선생님한테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 교회에서 베트남으로 파견 가신 선교사님이 오셔서 학교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는 아이들과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을 설명해 주셨다. 4M*4M의 작은 집에서 6-7명의 가족들이 함께 살는 베트남 시골 아이들은 십 대가 되어도 학교 근처에도 못 간다고 했다. 다들 교육은 받고 싶어 하지만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학교나 시설이 부족하다고 했다. 머리가 하얀 나이가 지긋하신 선교사님은 그곳에 희망의 학교(School of Hope)란 사설 교육기관을 짓고 십 년 동안 배움에 목마른 아이들에게 초등교육을 시키고 계신다고 했다. 바닥에서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의자와 책상을 받고 활짝 웃는 모습과 학교를 다니면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머리에 깊이 남았다. 선교사님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위한 학비와 통학을 위한 자전거 등의 후원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엄마가 생각났다.
아니 구체적으로 내가 입었던 교복을 힘든 형편의 아이에게 주었던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생각났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았던 학교 교육은 아직도 베트남 아이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예배가 끝나고 선교사님에서 중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통학할 수 있는 자전거를 후원해 주고 싶다고 얘기드렸다. 예전에 엄마가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며 힘이 되었듯이 나 역시 작은 돈이지만 그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고 힘이 되고 싶었다.
나는 자라면서 엄마랑 많이 싸웠다.
언제나 다정하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아빠와 달리 엄마는 너무 엄했고 오빠만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나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에 자주 대들고 엄마한테 짜증을 많이 부렸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엄마가 나한테는 만만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밖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가장 편한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 엄마가 아무리 맛있는 밥을 차려줘도 싫다고 하고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몇 년 전 조카가 놀러 왔을 때 나 역시 엄마처럼 몇 시간을 들여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줬었다. 하지만 조카는 비빔면을 먹겠다고 했다. 그때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엄마의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이민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 들으면서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내 엄마가 얼마나 좋은 엄마인지 새삼 깨닫고 있다. 모든 엄마가 다 나의 엄마처럼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나이듬은 그 나이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엄마한테 미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