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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Jun 09. 2016

에디톨로지 : 자신의 관점 찾기

[아워 북스] 에디톨로지 - 김정운 : 창조는 편집이다

영상 편집에 대한 다큐멘터리 The Cutting edge는 지난 이십 몇 년 동안 각종 드라마,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스토리에 치중해 흡수해온 나에게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서로 상관없는 영상을 짜깁기하고, 톤을 보정하고, 음향을 입히는 과정을 거치면 의미가 생기고,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종류의 자극을 느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정보 불평등'에 대한 대학원 졸업 프로젝트 자료를 찾으려 들른 작은 한글 서점에서였다. 교과서 같아 보이는 책을 신간이라길래 별 기대 없이 집어 들었는데, 의외로 내가 고민하고 있던 질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유학 와서야 구글 검색을 시작한 후 깨닫게 된 나만 몰랐던 사실은 '영어로 된 정보는 너무 많은데, 한글로 된 정보는 질은 둘째치고 일단 양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것 이었다. 언어의 특성상 지식의 양으로는 경쟁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신뢰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를 찾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마침 읽게 된 내용이 '한 줄로 계속 써 내려가야 하는 노트를 통한 기록과는 달리, 카드를 이용해 주제 별로 분류하며 기록하는 공부 방식은 주체적 사고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부분이었고, 작가의 '관점'에 따라 기승전결 문맥에 맞게 정보가 선별되고 편집되어 완성된 '책'이라는 전통적 매체의 변함없는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에디톨로지(Edit+ology)는 김정운 박사님이 만들어낸 용어로 '창조는 다양한 데이터 베이스의 주관적 편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첫 번째 장에서는 '마우스'의 발명으로 대표되는 하이퍼텍스트를 통한 지식과 문화의 편집에 대해, 두 번째 장에서는 공간에 의한 문화 편집,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개인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다룬다. 자기 스스로의 관점을 갖게 위해서는 일단 많이 보고 들으며 데이터 베이스를 쌓아야 한다. 정보를 무작정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의미하고, 스스로의 관점에 따라 분류하며 저장해야 한다. 그렇게 모인 다양한 정보들을 스스로 질문하고, 의심하고, 해체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통해 주관적 의미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데이터가 쌓여야 자기 생각이 생기고, 또 자기 생각이 있어야 더 효율적으로 데이터 베이스를 쌓을 수 있는 선순환이 생긴다. 저자가 제시한 데이터 베이스를 쌓는 실용적 방법은 에버노트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책의 주장 자체는 사실 엄청 새로운 것은 아니다.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 '탁월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오는가 (Where good ideas come from)'등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다룬다. 그러나 '에디톨로지'가 특별한 이유는 한국인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예시가 있고, 독일과 일본 유학생활을 거친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만의 방식으로 힘 있게 풀어나가기 때문이다. 솔직하고 단순하고 유쾌하다. 불쑥불쑥 나오는 발칙한 농담에 별로 적응은 못하겠지만, 덕분에 히틀러가 독일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궁금해졌고, 미국 역사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고, 프로이트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건 나뿐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또한, 유럽 사회가 가장 발달했고, 그 뒤로 미국, 일본 등이 따르며, 저 뒤 어딘가에 한국이 있고, 그 뒤로 빈곤한 이런저런 국가들이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성장하는 것처럼 사회가 발전한다는 생각 자체가 서구 중심적인 관점으로 편집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오늘 아침 가난하지만 이상적인 나라 '부탄'에 대한 동영상을 보면서 사회와 문화는 일방향으로 발전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작가님께서도 일본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 쓰신 책이어서 그런지, 타지 생활에서 느낀 점에 대해 특히 더 공감할 수 있었다.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생기는 이런저런 불편함, 이런 게 '절대 고독'이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뿐만 아니라, 가장 격하게 공감한 이야기는 교수님이고 학생이고 모두가 자신 있게 스스로의 주장을 한다는 부분이었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주로 '미국 어딘가에 있는 유명한 누군가에 따르면', '미국에서 잘 나가는 회사의 방식에 따르면' 등등 저명한 권위자에 기대어 설명하는 이론을 흡수해서 시험을 봤다. 반면 미국에서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교수님이 '이거 내가 만든 건데'라며 설명하거나, '우리 회사에서는 이렇게 해',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는 식으로 뻔뻔할 정도로 자신 있게 말한다. 대학원이라는 차이도 있겠지만, 여기선 꼬맹이들도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걸 보면 문화 자체가 그런 게 맞다. 이렇게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주장을 하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 바로 의심하는 것이다. 이러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전설 속의 신 같은 닿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인지하는 순간 정보를 수용하는 입장에서도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책을 다 읽어버렸는데 작가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 '책은 끝까지 읽는 게 아니다' 라니 약간의 배신감을 느낀다.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필요한 부분만 습득하면 되기 때문이란다. '기승전결'의 스토리 텔링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무튼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재밌는 책을 썼다는 것과,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 졌다는 점에서 한표.


스스로의 생각을 신뢰하고 책임지는 습관을 기르고 싶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맛집을 갔다가 후기를 써도 단순히 줄거리나 관찰한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서툴더라도 내 생각을 더해 글을 써나 가고 싶다. 그렇게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찬찬히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겠지.



책에서 읽은 문장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교수들은 자기 이야기 하기를 주저했다. 유학을 다녀온 이들은 아예 자기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스스로 생각해서 이론을 수립하는 것은 미국이나 유럽의 위대한 학자나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변부 열등감에 주눅 들어 보였다. 그러나 김용옥은 달랐다. 그는 '내 이야기'를 했다. 내용도 엄청났다. 논어, 맹자, 주역을 말하다가 느닷없이 가다머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설명했다. 고루한 논어, 맹자 이야기가 그렇게도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사이에 그런 식의 접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두려워하는 자기 생각 말하기, 즉 주체적 글쓰기가 김용옥에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크로스 텍스트'적 사유 때문이다." 69p


"자기 텍스트를 써야 제대로 학문을 하는 거다. 오늘날 인문학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텍스트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한국의 콘텍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의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한국에도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온 사람이 있다. 바로 이어령 선생이다....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적 사고는 이해 안 되는 것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 73p


"독일로 도망쳐 오기는 했지만, 당시 나는 역사의 맨 앞에 서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한국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순간, 하루아침에 역사의 가장 뒤꽁무니로 쳐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긴 듯한 상실감과 자괴감에 고통스러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83p


"'노트'와 '카드',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것을 하나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 편집 가능성이다. 그게 전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카드에 정리한다. 카드 맨 위에는 키워드를 적고, 그 밑에는 그것과 연관된 개념을 적고, 출처와 날짜 등을 차례로 적는다. 그리고 카드의 앞, 뒷장에 그 내용을 빼곡히 요약한다.... 여기서 헷갈리지 말아야 할 아누 중요한 사실이 있다. 카드 편집을 통해 새로운 이론 구성이 가능하려면 편집할 수 있는 카드가 아주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의 재료가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의 이론을 많이,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편집할 수 있는 카드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다. '실력이 있다'는 것은 편집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카드로 축적된, 편집 가능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라고 한다." 86p


"아리에스는 주택의 공간 편집과 '아동' 혹은 '따뜻한 가족'이라는 개념이 아주 깊은 상관관계가 있음을 주장한다. 18세기 이후, 주택 내부에 복도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매번 이방, 저 방을 거쳐 이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외부 방문객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 가족'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209p 


"수십 대의 카메라가 녹화한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뛰어난 에디 톨로 지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제7의 멤버'로 부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거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접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본 집단행동 경연 대회 동영상 공유. 집단행동이 부정적 의미를 갖는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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