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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na Jan 14. 2017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빛나는 그녀들을 응원하는 사적인 독후감

뉴욕에 살면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지만, 헤어짐은 여전히, 늘, 아쉽다. 지난 6개월간 나의 건강을 담당했던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읽던 책들을 남기고 갔다. 분주함에 까먹고 있다가 버린다는 친구의 친구의 위협에 올 겨울 최악이라는 눈보라 속을 뚫고 책을 찾아왔다. 한숨 돌리고 그의 책들을 훑어보며 의외의 취향에 웃음 짓다가,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의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펼치니 역시나 이 책을 먼저 읽을 줄 알았다는 듯 장난스럽게 꾹 눌러쓴 손글씨가 보인다.


'야 너 29살이지? ㅋㅋㅋㅋㅋㅋㅋ'


바로 발끈했지만, 이내 부정했다. 아니다. 아닌데? 한국 나이로는 지났고 미국나이로는 아직이니까 아닌 게 확실하지 않은가. 지금의 삶에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참, 스물아홉이란 나이는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 지는 이상한 나이인가 보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니. 도대체 작가는 이런 쓸데없이 자극적인 제목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궁금했다. 삼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상하게 몰입이 되고, 유려하지는 않지만 덤덤한 문장이 마음을 훍 뚫고 지나간다. 이거 뭐야 하는 생각에 책날개를 보니 실화란다. 이 여자, 참 많이 방황하며 자립했다. 


일본어로 자투리라는 뜻인 '아마리'를 필명으로 사용하는 그녀는, 뚜렷한 목표는 없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를 졸업했고, 미래는 걱정 없어 보이는 남자 친구와 결혼을 꿈꾸며 연애를 했고, 직장생활은 대충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별것 아닌 이유를 대며 그만둔다. 부모님과 남자 친구에게 의존한 채로 적당히 괜찮은 미래를 당연하게 꿈꾸며 결혼을 생각할 즈음 그녀는 실연을 당하고, 부모님은 편찮아지신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정신없이 발버둥 치다 보니 몇 년이 지나 스물아홉 생일. 현재 모습은 뚱뚱하고 못생기고 이뤄놓은 것 없고 돈도 없고 친구도 없는 초라하고 쓸모없는 여자일 뿐이다.


자살할 용기마저 없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한 아마리는 억하심정으로 1년 후 생일, 라스베이거스에서 삶을 마감하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죽는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나니 웬걸 삶의 의지가 불끈 생긴다. 그때부터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화려한 1주일을 보내기 위해 낮에는 사무직 비정규직, 저녁에는 호스티스, 주말에는 누드크로키 모델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만난 각계각층의 사람들의 삶을 엿보며 그녀는 성장하고, 우정을 쌓고, 혹독한 생활로 인해 반 강제적으로 살이 빠져 예뻐지기까지 한다. 스물아홉 생일 일 년 후, 그녀는 계획대로 모아둔 돈을 갖고 라스베이거스로 삶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어떤 근사한 재벌 남자를 만나 인생을 역전했다'더라는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결말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 1년 동안 모은 전 재산을 걸고 죽을 각오와 치밀한 전략으로 도박을 하며 짜릿하게 자극받은 아마리는, 비로소 의지를 갖고 현재를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두발로 선다.


아마리가 자립하기 위해 넘어서야 했던 건 신데렐라 콤플렉스였다. 작가는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미래를 준비했어야 하는 이십 대 초중반에, 막연한 낙관과 귀찮음으로 부모님과 남자 친구에 완전하게 의존한 채 대충 살다가 냉정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실 남성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잘 안된다. 그저 호스티스와 누드모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에 끌려 심심풀이로 읽게 되지는 않으려나. 하지만, 한국에서 자란 이삼십 대 여성들은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녀불평등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에 맞물려, 여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남자를 잘 만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각종 미디어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당하였을 테니까. 더군다나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직장 여성의 삶은 힘들게만 묘사되는지.


사람마다 자립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삶의 과제는 제각각 이겠지만, 돌아보면 나도 스스로 이루어 나가는 성취감을 맛보며 경제적, 정서적으로 홀로서기까지 작가와 비슷한 고민의 고비를 넘어왔던 것 같다. 아니 여전히 열심히 헤쳐나가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겠지. 


나의 이십 대 중반도 안정에 대한 욕구와 도전에 대한 열망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기였다. 미래에 대한 막연함에 그저 편하게 안정적으로 살고 싶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번뿐인 인생 정말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갈 수 있는 만큼 가보고 싶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지인들의 응원을 버팀목 삼아 조금씩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다 보니 후자에 가까워지는 선택을 해나갔고, 덕분에 다채로운 경험을 하며 삶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뉴욕으로 온 후 비로소 시작된 진짜 나의 '자립'은 치약과 샴푸를 스스로 선택하고(항상 당연하게 집에 있는 걸 썼다), 냉장고를 채워 삼시 세 끼를 스스로 챙겨 먹으며(계란 프라이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고민하며 직업과 직장을 선택하고(머리가 다 빠져버리는 줄), 타협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깨달으며 살 집을 고르고(뉴욕 집세는 상상을 초월한다. 아 그리고, 집에 세탁기는 당연하게 있는 건 줄), 그 모든 것을 경제적으로 혼자 힘으로 충당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힘으로 열심히 고민해서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다 보면, 비로소 주인의식을 갖고 진짜 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반대로 말하면, 책임지지 않는 삶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서로 독립적인 타인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립과 고립은 매우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만약 스스로 책임은 하나도 지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의존해서만 살아가고 있다면,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짐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비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생각해 볼만 한 것 같다.


죽고자 하는 각오로 꺼져가던 삶의 불씨를 되살려 스스로 일어선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자신의 삶을 더 사랑하자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저축조차 하기 힘든 사회는 분명 뭐가 잘못되고 있는 게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기 전에 세상이 변할 것 같지는 않다면, 어떻게든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며 행복해야지, 뭐 어떡하나. 사실 행복은 뚱뚱하건 날씬하건, 가난하건 부유하건, 능력이 있건 없건, 기혼이건 미혼이 건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부유하고 능력 있음이 삶을 기만하기도 하니까. 결국은, 자신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스스로가 믿는 가치에 맞게 자신의 속도로 나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느낀다. 하루하루 고민하면서 자신만의 의미를 조금씩 찾아 나아가는 독립적인 그녀들에게, 더 솔직하게 원하는 걸 성취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잘 해내고 있다는 응원이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스물아홉 생일 그 후에도 최선을 다해 행복하자.



마음에 남은 문장들

훗날 사회에 나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공부만'잘했던 사람이 꽤 많다. 자기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도 모른 채 고속열차처럼 학창 시절을 내달리다가 어느 날 '툭'하고 세상에 내던져진 그런 사람들 말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아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죄일 것이다. 28p


"뭐든 그렇겠지만 일류니 고급이니 하는 말은 늘 조심해야 해. 본질을 꿰뚫기가 어려워지거든
. 출세니 성공이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잣대를 갖는 거라고 생각해. 세상은 온통 허울 좋은 포장지로 덮여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기만의 눈과 잣대만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살아가는 즐거움 아닐까?" 122 p


"다들 말리더라. 안정된 직장 놔두고 그 나이에 무슨 짓이냐고 말이야. 하지만 난 도저히 꿈을 포기할 수가 없어하고 싶은 걸 못하면 죽을 때 엄청 후회하게 될 거야."
미나코는 나를 향해 말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나는 지금까지 서른을 코앞에 둔 대부분의 여자들은 결혼과 함께 안정된 생활만을 바라고 있을 거라 생각해 왔었다. 그래서 안정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뒤쳐져 있는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세상이 뭐라 하건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144 p


"... 고향에 있을 때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적의 행군을 막으려면 술과 고기를 베풀어라.'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오늘 이 만찬을 계기로 다시 나의 오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어" 16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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