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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Jan 04. 2022

겁쟁이였던 내가 그립다.

            

겁쟁이였던 내가 그립다

나는 사회복지사이면서 정신보건사회복지사이다.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하였다. 

내가 근무했던 병원은 약 250병 상의 정신과 병동이었으니 그 지역에서는 꽤 큰 병원이었다. 

입원 병동은 4층에 있었고, 사회복지실과 임상심리실이 옥상에 있었다. 


옥상에서 환자들은 흡연실에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간식을 가지고 와 다른 환자들과 나누기도 하고, 부지런한 환자들은 옥상 가득 상추, 방울토마토, 쑥갓, 고추 등 채소를 심어놓고 아침저녁 물뿌리개로 물을 주었다. 


이른 아침 출근을 하면 벌써 옥상에 습기가 가득하여 청량감을 주는 아침이라 기분이 좋았다.

하룻밤 사이 조그마한 고추, 가지, 오이, 호박이 쑥쑥 자라 있어 참 신기했다.


정신과 병동은 알코올 환자, 조현병 환자, 우울증 환자, 인격장애 등의 갖가지 증상을 가진 환우들이 폐쇄된 공간에서 살고 있어 그 장소 역시 지역사회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인지행동치료, 집단상담, 요일마다 다른 요법(에어로빅, 탁구, 명상, 서예, 요리 교실, 비디오 감상), 병원 생활을 착실히 잘하고 escape 가능성이 적은 환자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 김밥을 싸서 소풍도 신선한 바깥공기도 마시고 오기도 했다.


환잔들이 폐쇄 병동에 입원하면 매일매일 식후 줄을 서서 차례가 되면 간호사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는다. 

그래서 병원 내에서는 증상 조절이 잘 된다.

그래도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거나 다른 요인에 의해 순하기 그지없는 분이 갑자기 acting out으로 병원 전체가 초비상이 될 경우가 있다. 

환자 중에 특별히 나와 이야기를 많이 한 애자(가명) 씨가 있었다.


애자 씨는 50대 후반으로 뚱뚱하고, 긴 단발머리를 잘 감지 않아 기름으로 엉겨 붙어있고, 눈이 힘이 없는 분이었다.


어느 날,  옥상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을 보고, 평소 무뚝뚝한 애자 씨가 웬일인지

나에게 “꽃이 예쁘다”며 “선생님은 무슨 꽃이 제일 좋으냐”라고 물어, 

나는 산에 들에 막 피어 있는 야생화가 좋다고 하고 “애자 씨는 무슨 꽃을 좋아하냐”라고 묻자 

본인은 “꽃은 다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한적하고 평화로운 점심시간이었는데  잠시 후 무슨 연유인지 4층 치료실에 난리가 났다.

병동으로 내려가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이야기를 곱게 나누고 있던 애자 씨가 거품을 물고 acting을 심하게 하고 있었다. 


평소 얌전했던 애자 씨가 쌍욕을 하고 있어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나도 합세하여 치료진들이 제압하려고 있는 힘을 다하였다.


애자 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나의 머리채를 잡아 뜯으려는 행동을 보여 나는 온 힘을 다해 애자 씨를 내 몸에서 물리치고 집중치료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환자를 제압하지 못하고, 그 힘에 밀려 뛰쳐나오고 나서 멀리 가지도 못하고 집중치료실 문 옆에 서서 큰 숨을 쉬고 창문으로 애자 씨의 모습을 보았다.


애자 씨의 그런 행동을 왜 했을까? 가 아니고 

아니 내가 미쳤지! 머리를 잡아 뜯기던지, 주먹으로 맞던지 그 자리에 끝까지 못 남아있는 게 너무나 창피했다. 아직까지 나의 커다란 흑역사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 일 이후 나는 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까? 나름 분석을 하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인 것 같다. 


그 당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색깔 잡기, 다방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고무줄놀이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날 친구들이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하는 놀이를 하였나 보다. 


나는 그날 교육열이 높은 우리 엄마 등쌀에 못 이겨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방구 놀이를 하는 우리 동네 큰 공터에 친구들이 둘러앉아 있어 반갑게 뛰어가 비집고 들어갔다.


피아노 가방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공깃돌 몇 개를 손에 튕기고 있는데 갑자기 덩치가 산 만한 동네 아줌마가 씩씩거리며 오더니 “너냐? 니가 매일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간 거지?”하면서 귀싸대기를 온몸에 실어 때려 나는 순간 나가 자빠질 뻔했다. 나는 방어할 사이도 없이 낯선 아줌마한테 얻어맞고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큰 눈에 눈물만 나왔다.


아줌마랑 같이 왔던 친구가 

'아줌마 얘가 아니라 얘 옆에 있는 애가 아줌마네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을 간 거예요?' 했다.


으악스러운 아줌마는 머쓱한 지 미안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내가 더 열 받는 것은 정작 초인종을 누르고 도망간 내 친구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고 쌩하니 가는 거였다. 

억울해도 너무 억울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내 인생은 왜 이따위인지....


그 짧은 순간, 그 힘든 생활 가운데 우리 반 친구들이 아무도 안 배우는 피아노를 가르친다고 애를 쓰는 엄마가 불쌍했다. 

그러기에 울며 불며 엄마한테 어떤 아줌마한테 맞았다고 하면 엄마가 더 속상해할까 봐 퉁퉁 부은 눈물을 가라앉히고 늦게 집에 갔다.


난 그 이후 누군가 내 옆에 갑자기 나타나면 깜짝깜짝 잘 놀란다. 

큰 소리로 싸움을 하면 구경을 하는 게 아니라 돌아서 그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말도 할 수 없이 의협심이 발동을 하기도 한다.

또한 억울함을 당하면 굉장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때 그 사건으로 인한 내 마음의 상처가 깊은 연유가 아닐까 싶다.


그리 여렸던 내가 통합사례관리사로 일하면서 쌈닭이 되었다. 

이용자들이 참으로 감동을 주는 분도 있지만 본인의 삶이 너무 척박하다 보니 좋을 때는 선생님이지만 본인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바로 쌍욕을 하는 분도 계시다.


나는 고상하고, 말도 조곤조곤한 사회복지 실천가가 되고 싶은데 어떤 때는 이용자들의 성향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하기도 한다.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해야 사회복지 실천이 먹히는 실정이다.

 

이 와중에

나는 남성 호르몬이 격하게 많아지는 생의 주기에 서 있다.

목소리는 날로 커지고, 입은 걸어지고, 행동은 과격해지는 나를 보면서, 그 옛날 온몸으로 따귀를 맞고도 닭똥 같은 눈물만 흘리고 엄마한테 이르지도 못한 어린 소녀의 모습은 어디 갔을까 생각해본다. 


이번 생애에는 이용자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말씨로 다가가는 통합사례관리사로 살기는 글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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