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길냥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선 Oct 13. 2020

가족과 이웃

길냥일기 #05

쪼꼬미 나미의 등장으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어. 맘씨 좋은 아지트 아줌마 아저씨는 집냥이를 들였다고 우리들 밥자리를 치우지는 않았어. 물론 가끔씩 등장했던 간식 캔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 그래도 쪼꼬미 나미가 입이 짧은 덕에 남은 사료를 얻어먹을 수 있었어. 집냥이들이 먹는 사료는 정말 부드럽고 맛이 있더라고. '베이비'용 사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 세상에...


시간이 지나면서 쪼꼬미 나미는 종종 데크 유리문 저쪽에서 하염없이 데크 쪽을 바라보곤 했어. 가끔씩 말을 붙여 보았지. 사실, 궁금했거든. 집냥이 생활이 어떨지 말이야. 우리처럼 밥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아야 하는 처지로 보면 확실하게 때마다 사료를 준비해 준다는 건 부럽더라고.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따뜻하게 바람을 막을 공간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도 꿈만 같은 일이었어.


어느 날, 데크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나미가 창 안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더군. 그때 처음 나미와 말을 텄어. 나를 조금 무서워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내가 무슨 위협이 될 수 있겠어. 그 점에서 마음이 놓였던지 날이 갈수록 나미는 내게 말 거는 빈도가 잦아졌고,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우수수 털어 내기도 했어. 아저씨 배 위에서 자면 따뜻하고 잠이 잘 온다는 것과, 아줌마가 자신을 위한 물품들을 사들여 매일매일 택배 상자가 집에 온다는 그런 얘기들 말야. 자기는 택배 상자 안에 있는 캔이나 장난감보다 상자가 더 좋다는 철없는 얘기도 스스럼없이 하더군.


그래, 나미는 철이 없는 아이였어. 자신도 북한산에서 길냥이로 태어났고 비가 오는 날 버려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해장국집 사장님이 구조해줘서 겨우 살았고 그 후로 이곳에 입양 오게 되었다는 묘생 스토리를, 산전수전 다 겪은 내 앞에서 잘도 읊어 대더군. 그러면서 자신도 '길냥이' 였다는 것을 꽤나 자랑스럽게 얘기하는데 하마터면 꼬맹이에게 빈정상할 뻔했어. 철없는 것... 하긴, 묘생 3개월 차 쪼꼬미가 어떻게 철이 들었겠어. '길냥이' 출신을 강조한 것도 모두 나와 친해지려 했던 것으로 이해하려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니깐.


나미는, 아줌마, 아저씨에 대해 '가족'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어. 자신이 아줌마, 아저씨의 가족이라는 거야. 순간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헛웃음을 웃었지. 사실 그렇잖아.. 어떻게 인간이 고양이의 가족이 될 수가 있겠어. 인간이 고양이를 낳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기껏해야 움직이는 인형 취급을 하지 않을까.. 내가 집냥이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이미지야. 밥 주는 인형. 하지만, 조잘조잘 떠들어내는 쪼꼬미가 귀여워서 그냥 들어주었지.


그런데 말야.. 나는 길냥이의 생활에 대해 얘기해주고, 나미는 집냥이의 일상에 대해 말해주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어. 글쎄, 집 안에 나미의 화장실이 있는데 아줌마가 모래를 2주에 한 번씩 갈아준다는 거야. 더욱 놀라운 것은, 나미가 똥, 오줌을 싸면 인간들이 모래에 뭉쳐진 '감자'와 '맛동산'을 캐내서 버려준다는 거야. 배설물을 인간들이 청소해준다고?!


웬일인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 태어나서부터 평생을, 그런 케어를 받아 본 적이 없었거든. 나에게 밥을 주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고맙고 고고한 존재로 여겨졌던 인간들이, 아줌마 - 아저씨가 저 쪼꼬만 고양이의 배설물을 치워 줄 만큼, 쪼꼬미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잖아. 놀라웠고, 서글픔을 넘어서 마지막엔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어. 왜 난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건지...



그래, 나미는 인간들에게 '가족'이었던 거야. 그 날은 애써 내 감정을 숨기고 말았지만 다음에 나미와 대화를 할 기회가 있을 때 물어보았지.


'네가 아줌마 아저씨의 가족이면 나는 뭐냐고...'


참으로 한심한 질문이라 말을 뱉는 순간 후회했지만, 우리의 쪼꼬미 현자 나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했지.


'아저씨요? 아저씬 이웃이죠. 나와 우리 가족의 이웃이요!'


그래.. 가족과 이웃은 '종족'으로 나뉘지 않는 것이구나. 그래, 나의 이웃 나미, 부러우면 지는 건데, 나는 가족을 가진 네가 진정 부럽다. 내가 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상사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