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남자들의 찌질미(美) 예찬
JTBC 드라마 '순정에 반하다' 속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이상하게 불쌍하고 가여워 보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게 바로 찌질한 미를 지닌 남자 주인공들이 지닌 유일하고도 강한 마성이다.
청소년 관람 불가에 외화라는 치명적인 핸디캡을 지녔음에도 국내 600만 명의 관객 몰이를 했던 영화 '킹스맨'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수트를 말끔히 차려 입은 스파이라는 신박한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콜린 퍼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찌질미'를 마음껏 발산했던 태론 에거튼의 완벽한 케미가 액션 영화에 큰 관심 없던 여성 관객의 눈길을 끄는데 크게 한 몫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직 콜린 퍼스 때문에 보기 시작한 킹스맨에서 여자들은 꿈도 미래도 없는 구제 불능한 소년이 킹스맨 요원이 되기 위해 겪는 역경을 지켜보며 모성애를 가득 품었다가 영화 후반부 그가 콜린 퍼스처럼 완벽한 수트핏을 자랑하며 'Manner maketh the man.'을 내뱉는 장면에서 뒤통수를 맞는다. 마치 마냥 어린 아이로만 보았던 동생에게 돌직구 고백을 받는 순간처럼. 이쯤 되면 태론 에거튼에게 찌질미와 더불어 반전미를 하나 더 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렌지 빛 헤어에 얼굴에 난 주근깨. 전형적인 소년의 모습이자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의 모습이다. 영화 속 어딘가 어리숙 하고 귀여운 외모를 뽐냈던 그는 사실 이 전 작품에선 그리 귀여운 모습은 아니었다. 2010년과 2011년 개봉한 영화 해리포터에서 사고뭉치 론 위즐리의 맏형 역을 맡았던 배우도 돔놀 글리슨 이었던 것. '어바웃 타임'에서 비로소 얼굴을 알린 그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본 숙맥을 연기했다. 하지만 일생 일대의 운명적인 사랑을 발견한 순간엔 소심함도, 망설임도 없다. 미래가 어떻게 바뀌게 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겁 없이도 옮겨 다닌다. 연극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만난 첫사랑의 유혹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와 대뜸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결혼해 달라고 프로포즈까지 한다. "대답할 말이 생각 안나? 그래, 싫어, 내 인생에서 꺼져 등의 답변이 있어"라고 말하며 긴장하는 순간엔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 없다. 이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자들이 정말 바라는 건 잘생긴 외모나 재력이 아니라 어딘가 찌질해 보여도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처럼 순수하고 우직한 마음일 거라는 걸.
남자들에게 이 영화가 잊혀진 그 시절 나쁜(!) 첫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슬픈 영화라면, '건축학개론'하면 내게 떠오르는 잔상은 좀 다르다. 한가인이 예쁘장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욕을 (너무나 어색하게) 하던 장면, 납득이가 뻔뻔하게 키스하는 방법을 직접 시연하기까지 하면서 알려주던 장면, 그리고 첫사랑의 그녀가 술에 취해 선배와 함께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서글프게 울던 장면.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이 첫사랑에 성공한 숙맥이라면, 건축학개론은 숙맥인 데다 첫사랑까지 실패한, 정말 찌질한 남자일 거다. 그럼에도 여우 같은 선배(유연석)보다 곰 같은 이제훈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남자들이 그렇듯 여자들도 그를 통해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친해지고 싶어 주위를 어슬렁 거리지만 막상 말 하나 쉽게 놓지도 못하던 첫사랑, 미숙하지만 순수했던 첫 뽀뽀의 순간…. 건축학개론의 이제훈처럼 남자건 여자건 첫사랑의 잔상은 늘 이렇게 찌질하다. 그래서 더 그리운 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그때 같은 사랑을 할 수 없을 테니.
이 남자의 찌질한 만행(?)을 읊자면 다음과 같다.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같은 과의 여신 같은 선배가 어느 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역시 지난 밤, 신입생 환영회에서 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선배 앞에서 술 주정에 오바이트까지 시원하게 해버렸다. 여신 선배를 따라 같은 동아리에 덜컥 가입한 후 어느 날, 선배와 단둘이 과방에 있게 됐다. 혼자 누나와의 로맨틱한 순간을 상상하다 혼자 19금의 순간까지 가버렸다. 순간 자신을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에 제 발이 저려 뺨을 때리고 정신 차리라며 소리까지 지른다. 바로 영화 스물에서 공부만 잘하는 스무 살, 경재를 연기한 강하늘이다. 지금껏 줄 세운 장면 말고도 그의 찌질함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 뭘 얼마나 더 말해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더구나 강하늘을 능가하는 찌질한 남자들은 둘이나 더 출연한다. 찌질함으로 가득한 이 영화를 생각 없이 웃으며 보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무엇이 마음을 쿡쿡 찌르는 게 느껴진다. 학교-집, 같은 길을 걸어갔던 10대의 우리가 영화 속 주인공 3인방 처럼 스무 살이 되며 저마다의 길을 내딛기 시작한 그때가 스크린 위로 자연스레 겹쳐진다. 찌질할 수 밖에 없었던, 찌질해서 더 좋은 스물의 찌질미가 그와 우리 모두에게 있었다. 철없이 찌질하기만한 저 스무살의 청년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