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때 내 꿈은 애니메이션 작가였다.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열풍이 대단했던게 큰 이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어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그야말로 지브리 전성시대였다. 방과 후 애니메이션 클래스에 참가해 무수한 선만 그어댔다. 앉아 있는 사람 하나 그리기도 어려워서 쩔쩔 맸지만 꿈만큼은 [원령공주] 급이었다. 13살때 부모님께 애니메이션 용 태블릿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꿈은 금방 식어갔고 지금은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추억이 됐다.
어른이 됐지만 애니메이션, 만화의 세계는 여전히 무궁무진하다. 휴무날이면 만화방에 콕 박혀 읽고팠던 단행본을 끝낸다. 자기 전에는 웹툰을 달리다가 밤새기도 일쑤. 만화가 가지는 힘은 크다. 영화와는 다르게 상상력을 그대로 펼쳐볼 수 있는 장르다. 때문에 으레 스릴러, 로맨스, 액션 등 장르가 나뉘는 영화 애호가들과 달리 만화 애호가들은 닥치는 대로 다 본다. (내가 그렇다.) 만화의 대한 애정은 누구나 한 권쯤은 품고 있지 않을까.
그런 만화를 만드는 건 작가와 '편집자'다. [중쇄를 찍자]는 주간 바이브스 라는 일본의 한 연재 만화 잡지 편집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웃는 입술이 매력적인 배우 쿠로키 하루가 극을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 부상으로 국가대표 유도선수를 그만두고 출판사에 입사한 우당탕탕 신입사원 적응기 정도로 봐도 좋다. 여느 일드처럼 에피소드 10개안에 최대한 교훈을 뽑아내려 애쓰는 편. 지난해 히트쳤던 드라마 [저, 정시에 퇴근합니다]와 비교해보면 사뭇 다른 느낌으로 오피스 라이프를 그린다. 흐린 눈으로 보면 즐거운 편집부 생활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블랙기업이나 마찬가지...(일과 생활의 경계가 없다. 그런 점을 오히려 당연히 받아들이는 주인공)
그래도 의미 있는 드라마다. 세상에 저런 회사가 어디있어? 하고 핀잔 주면서 아무생각없이 10화까지 달리게 되는 드라마. 일본 특유의 교훈 주기 스킬만 조금 견뎌낸다면, 편집자의 세계를 간접경험해 볼 수도 있다. 더불어 쿠로키 하루의 긍정 넘치는 자세에서 배울 점이 1% 가량은 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야스이 상. 쿠로키 하루처럼 열정 넘치는 편집자에서 잡지 폐간 등 각종 풍파를 겪으며 사생활과 업무를 칼같이 분리하게 된 사람. 극 중에서는 냉혈한인지만 알고보니 사연있는 캐릭터로 묘사되는데, 사실 그게 우리가 맞춰가야할 워라밸 아닌가 싶었다. 물론, 싸가지 없는 성격까지 롤모델이라는 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결국 연재 작가로 데뷔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되는 문하생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포기해야 할 때에 포기할 줄 아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성공하지 못한 작가 그 뒷 이야기까지 다루어줘서 고마웠다.
중쇄를 찍자(일본TBS, 2016)
(※본 글은 N회차 감상시 그때그때 내용이 바뀔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