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i Kim Feb 05. 2021

가장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 뭘 할까.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려가다 보면 어느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재밌고, 어느 웹툰이 인기더라, 뭐가 어느 플랫폼의 대표작이니 꼭 봐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찔린다. 콘텐츠 창작자임에도 나는 많은 작품을 찾아보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을 보는데도 공부를 하는 것처럼 꽤 굳은 결의가 필요하다. 어떤 미션에 도전하듯이 그 콘텐츠에 완벽히 뛰어들어야만 '아, 내가 콘텐츠를 좀 봤구나' 싶다.

 

이래 놓고 내가 기획자라고,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인기 있는 콘텐츠들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 요즘 이런 걸 보고 있고, 무지 재밌고, 이런 인사이트를 얻었어요"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번 생각해봤다.

난 쉬는 때에, 남들이 열심히 콘텐츠를 디깅하는 시간에 뭘 할까.

의외로 간단한 답이 나왔다.

나는 생각을 한다.


나는 대부분 '결핍'에 대해 생각한다. 나의 고민,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장 많이 생각한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 가며 내게 폭풍처럼 불어닥친 일에 대해 다각적으로 사고하려고 한다. 감정적으로도 접근해보고, 이성적으로도 접근해보고, 제삼자가 되어 나의 불안감을 조망해보기도 한다.


어느 정도 스트레스의 밀도가 높아지고 나면 마침내 결심한다. 그래,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 '이것'을 해야겠구나. 그 마음을 먹은 뒤에 남은 것은 하나, 실천하기다. 나의 결핍을 '채울 것'들을 다시 굳은 마음으로, 미션을 수행하듯 일상에서 천천히 부러뜨려 나간다.


회사에서 창작자로 일할 때는 웹소설들과 순수문학을 번갈아 보며 분석하고 기성 작가에게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 SOS를 치고 그들의 조언대로 공부를 했다.

통역 역할로 회의에 불려 간 뒤로는 출퇴근길, 출장길, 잠들기 전,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래서 결과가 좋냐고?

음. 그게, 꽝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하늘에 사시는 분은 나한테 시련을 잔뜩 주기로 결심이라도 하신 모양이다.


창작에는 실패했고 영어 실력은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나 자괴감이 아니 들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한다. 물론 불안감은 존재한다. 그 걱정 불안과 싸우기도 하고, 그 걱정 불안을 끌어안아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보씩 걸어간다.






이 생각을 하고 나니 나의 아킬레스 건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더 이상 내가 콘텐츠를 많이 섭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다.

누군가는 이런 독종 같은 모습을 높이 사기도 할 것이고, 이런 점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믿어본다).


아쉬운 건, 적어도 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천재들을 동경하며, 생각이 (나처럼) 단순하지 않고, 아이디어가 팍팍 튀는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비교의식에 찌들어 스스로 땅굴 파고 들어가 울고 있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깨달은 새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또한 나의 결핍임을. 이 결핍을 받아들이고 채워나가기로 했다.

이렇게.


나는 퍼킹 프리킹 멋있어. 나는 훌륭해. 골치 아픈 일이 생겼지만 좀 흥미롭네.

어쨌든 결국엔 난 잘 될 거야.


어쨌든 결국엔 난 잘 될 거야.


요즘 이 생각을 주문처럼 실천하고 있다.

어쨌든 결국엔    것이다.




*제목은 북저널리즘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차용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잡지의 맛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