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은 나의 바람을 그대로 채워내야 하는 희망사항란의 빈칸이 아니다
결혼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6년 6개월 만났다. 그동안 고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오래 만난 만큼 다양한 이유로 수많은 고비가 있었고, 실제로 두 달 정도 헤어졌던 기간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우리의 결론은 결혼이 됐고, 우리의 또 다른 시작점도 결혼이 됐다.
한 번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사귈 수 있었는지 더듬어볼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떻게, 6년 연애를 할 수 있었을까?
성격이 좋아서, 원래 마음씨가 착해서 서로를 배려하고 잘 지냈을 거라고?
단단한 오해다. 남자 친구와 나는 둘 다 '너무 착해서 탈인'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고집도 세고 자기 의견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펼친다.
생각해 보니 사귀고 2년 정도는 삼일에 한 번 꼴로 싸웠다. 그 뒤로는 일주일에 한 번, 그 뒤엔 이주에 한 번.
그러나 아무리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서로를 비꼬고 빈정거리며 화를 돋워도, 절대 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욕설이다.
만약 싸우다 상대방의 말에 상처를 받으면, "그 말 나에게 너무 상처가 됐고, 다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싸우는 도중에도 말하고, 싸움이 끝난 뒤 마음이 진정됐을 때도 차분한 상태에서 다시 말했다. 그리고 꼭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잘못된 점은,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아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말을 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실제로 6년이란 기간을 만나오는 동안 나는 오빠에게, 오빠는 나에게 상처가 됐던 말을 점점 하지 않게 됐다.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싸움의 결과로 '배웠다'기보단 '터득했다'는 표현이 조금 더 옳다.
싸움은 최대한 피할 수 있으면 좋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맘에 안 드는 부분은 말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을 때, 우리는 말하는 방식을 바꿨다.
"오빠가 책을 너무 안 읽는 게 싫어. 책 좀 읽으면 안 돼?"
"오빠, 내가 진짜 재밌게 읽은 책이 있는데 오빠가 읽어도 흥미롭게 잘 볼 것 같아. 빌려줄까?"
그럼 대개는 okay다. 상대방이 거절하더라도, 실망하거나 상처 받지 않았다. 왜?
결국 나는 나, 오빠는 오빠다.
자기 계발에 관심이 많고 성장 욕구가 강한 나에 반해, 오빠는 안정적이고 조금은 정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다. 쉴 때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모임을 간다면, 오빠는 엄지 손가락이 까지도록 플레이스테이션을 하고 롤을 하고 골프를 친다. 한때는 그런 오빠에게 아쉽고, 좀 더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오빠는 나의 바람을 그대로 채워내야 하는 희망 사항란의 빈칸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 사람 나름의 생활 기준과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억지로 고치고 바꿔내려 하면 불행해지는 건 나 자신이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고, 이 사람이 가진 본연의 모습에서 장점을 찾아내면 삶은 조금 덜 피로해지고,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진다.
연인은 내가 믿고 의지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아빠'는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나의 힘듦을 100프로 받아내지 못한다고, 징징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연인으로서 자신의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내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강요하기 전에, 나의 말을 듣고 때로는 나의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상대의 입장은 어떨지 생각하는 것. 이것이 내가 배운 '상대에게 실망하지 않고 오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물론 남자 친구가 있으면 의지가 된다. 하지만 설령 남자 친구가 없더라도, 나는 혼자서 나의 생활을 망치지 않고 유지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남자 친구가 2년 동안 미국 유학을 갔던 적이 있다. 장거리 연애를 버틸 수 있겠냐는 걱정 어린 시선을 많이 받았지만, 남자 친구가 없는 동안 내게 세상은 모험과 신비의 대상이었다.
처음 시작한 직장 생활, 서울로의 이사, 남자 친구가 없는 시간 동안 혼자 영화를 보고 한강을 거닐고 쇼핑을 하고 주중에 못다 한 일을 하는 모든 일상적인 것이 새로웠다. 내 인생에서 남자 친구를 도려낸 것이 아니라, 비어진 시간을 다른 활동으로 채워나갔다. 마치 그 활동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생동감이 넘쳤다.
적정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롱디는 문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우리의 연애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정말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아마 이것으로 책 한 권을 쓸 수도 있을 것 같고, 열두 시간 동안 혼자 떠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고, 매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같은 다짐을 하며,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상대방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의 편안함, 즐거움, 충만감이 너무나 크고 감사하기에 그런 사소한 아쉬움쯤은 우리의 관계에 별로 큰 이슈가 되지 않는다.
연애할 때 내가 배운 것들을 마음속에 잘 저장해 두고 꼭꼭 소화해낸다면,
아마도 나는 결혼 생활도 잘 해나가지 않을까 싶다.
기분 좋은 자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