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예수 말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사랑의 계명에 얽매이고/ 도덕윤리에 무릎 꿇고/ 정치권력에 이용당하고//
도저히 물러설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정의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가//
사랑하라 참아라 수용하라/ 인내는 관용의 미덕이 아니다/ 패배다, 굴종이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마지노선-배수의 진을 치다//
두 눈 부릅뜨고/ 긴 창 꼬나 잡고/ 살아남기 위한 결전을 벌이다//(졸시 <마지노선>, 졸시집, 「바람구멍」중에서)
몇 해 전 프랑스의 ‘마지막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Stéphane Hessel)의 『분노라라(Indignez-vous!)』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관용’이라 번역·사용되고 있는 ‘똘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어떤 이유로 노옹(老翁)은 죽음을 앞두고 조국의 시민들에게 ‘분노하라!’고 외쳤을까? 이 책이 출간된 지 3년 후인 2013년 2월 27일 파리에서 에셀은 세상을 떠났다.
“악법도 법이다!”
우리는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전 한 말이라고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맹목적으로 이 말을 배우고 자란 우리들은 ‘악법’이라도 실정법이라면 무조건 지키고 따라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권창은·강정인 교수는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위의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저자들은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이 말은 일본의 법철학자 오다카 도모오가 1930년대에 출판한 『법철학(法哲學)』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도모오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평소 “악법도 법이므로 이를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신 것이라고 썼다. 즉,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 책의 내용을 교묘하게 비틀어 일본군국주의와 한국의 과거 군사독재정권은 세계4대성인으로 추앙받는 소크라테스를 내세워 자신들의 비민주적·반인권적 법제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절대왕정체제를 부정하고 근대주권국가체제를 도출한 유럽계몽주의사상가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인의 주체성 확립’이다. 국가가 국민으로서 개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를 구성하고 규율하는 주권자이자 지배자로서 개인이 국가를 규정한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따라서 국가가 그 개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제한할 때 주권자인 개인은 그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에 직접행동으로 대항할 수 있다. 바로 개인의 ‘저항권’으로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1871년 파리코뮌은 그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1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동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필요한 경우 기본권도 “법률로써” 제한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단서조항을 두어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헌법 제37조 1항의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또한 1항의 의미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동조 2항 전단에 지나치게 몰입하고는 그 후단의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문언을 무시하곤 한다.
국제인권법 강의를 하면서 헌법 제37조 2항의 해석을 두고 우리 법원사(法院史)에 있어 치욕적인, 소위 ‘사법살인’으로 간주되는 인혁당사건을 비롯한 여러 공안사건들과 국가보안법의 존폐 여부에 대해 토론을 하곤 한다. 그런데 예상을 뛰어넘어 다수의 학생들이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그들은 제37조 2항의 문언을 충실히 적용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또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니 무슨 문제냐는 논리를 전개한다. 문언주의에 따른 철저한 법실증주의에 입각한 시각이다.
우리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를 읽어보면, 헌법 제37조 2항을 적용하기 위한 이론적 논거로 ‘침해최소성원칙’과 ‘법익균형성이론’, 그리고 ‘과잉금지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이론의 내용은 그럴 듯하다. 문제는 헌법 제37조 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무제한으로 침해할 수 있는 위험한 규정일 수 있다는 데 있다. 비록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또 “법률로서 제한할 수 있다”는 제한규정을 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역사적 과정에서 우리는 그 폐해를 충분히 경험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의견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상과 의사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의 중요한 목록의 하나니까.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할지라도 도저히 ‘넘어서는 안 될 한계’, 즉 ‘마지노선’이 있다고 가르친다. 소위 ‘자유민주주의’가 유지·존속되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 즉 ‘법적 정의’가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기존의 사법시험이든 또한 현재의 변호사시험이든 미래의 법률가인 학생들이 소위 ‘수험법학’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법학자도, 학생도 온통 시험합격에만 매달리고 있는 형국이니 ‘법적 정의’를 배우고 가르칠 여유도, 관심도 없다. 우리 대학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불의한 현실에 분노하라!
학문에 앞서 이 땅의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청년들에게 사회의 불합리와 비리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것을 관용이라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사랑해야 한다는 종교적 혹은 도덕 윤리적 계명을 앞세워 원수마저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쳐서도 안 된다. 도저히 물러설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정의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가르치고 토론해야 한다.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참고, 수용하는 것이 더 이상 관용의 미덕이 아님을, 그것은 패배이자 굴종임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우리가 사랑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마지노선을 설정하고 배수의 진을 쳐야 한다. 그 가치를 제한하고 침해한다면, 두 눈을 부릅뜨고, 긴 창을 꼬나 잡고 살아남기 위한 결전을 벌여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시민이 지녀야 할 덕목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