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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복 Jan 01. 2020

자작시로 읽는 에세이(12)-바람구멍

바람 많은 섬/ 제주도


돌담에는/ 온통 구멍이다


가로막기보다/ 틔워주고


맞서 싸우기보다/ 지켜보고


해법은/ 바람길


쑹쑹 구멍 뚫린 돌로/ 얼기설기 담을 쌓는 것이다


오늘도 제주도에는/ 웅웅 세찬 바람 불지만


구멍 속 길 따라/ 바람은 절로 사라져간다// (졸시 <바람구멍> 전문, 「바람구멍」중에서)


제주도는 여자와 돌, 그리고 바람이 많다고 하여 ‘삼다도’(三多島)라 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비(性比)는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주도에는 돌도 많고, 바람도 많다는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이 시를 쓴 때가 어느 해 12월 중순, 겨울 찬바람이 오름을 따라 세차게 불던 날이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막혀있는’, 즉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남편, 그리고 부모와 자식이, 학교에서는 선생과 제자가, 사회에서는 상사와 부하직원이 서로 막혀있어 대화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 직장에서 근무가 끝난 후 잦은 회식을 하는 것도 평소 서로 막힌 것을 공식적인 관계에서는 풀지 못하고, 비공식적인 관계를 통하여 풀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화할 줄 모른다. 친구들끼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가도 어른이나 상사 앞에만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강의실에서 벗어나 학생들과 모임 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게 바로 ‘대화와 소통’이다. 매번 “선생을 삐에로로 만들지 말라”며 간절하게 부탁을 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선생의 얼굴만 바라보고 입을 굳게 닫고 있다. 나는 나대로 그런 학생들을 대하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 말을 하다보면 선생만 떠들고 학생들은 다소곳이 듣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만다. 그럴 때마다 심경이 참담하고 괴롭다. 우리들은 왜 이리도 대화할 줄 모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이 가지는 인간에 대한 관념의 차이이기도 하다. 근대유럽철학의 기초는 ‘자아’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즉, ‘나’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너’와 ‘그’,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규정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아시아에서는 ‘집단 속에서의 나’, 즉 ‘우리’라는 공동체 속에서 ‘나’와 ‘너’, 그리고 ‘그’와의 관계가 규정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언어에서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우리 집’은 영어와 불어로는 ‘마이 하우스’·‘마 매종’, ‘우리 아들·딸’은 ‘마이 선·마이 도터’·‘몽 피스·마 피어’이다. 사물과 사람을 ‘우리’라는 공동체 내지는 집단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한글과 달리 영어와 불어는 기본적으로 ‘나(의)’라는 개인의 관계에서 바라본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근대(성)은 개인의 주체성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어 왔다. 이런 까닭에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고, 평등한 존재다”라는 개인의 주체성에 근거한 자유평등관념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시아의 상황은 어떤가? 근대유럽교육을 통하여 인위적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을 도입하다보니 전통적 관념과 뒤섞여 다분히 혼란스런 인간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군주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형식적으로는 사회정치체제의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인 교육의 민주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가정교육-제도권교육-사회교육제도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긴밀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사회는 교육은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교육의 민주화 없이 사회와 정치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개인의 성취가 가문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교육 풍토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주체성과 창의성이 존중받을 여지가 없다. 사회가 온통 성적위주의 경쟁과 입시위주의 교육 풍토 아래 점수에 따라 개인의 등급을 매기는 형국이다. 교육의 사라지고 학생이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되어 있으니 세상은 나를 짓밟고 올라서려는 경쟁자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학생 개개인에게 동료애와 형제애를 가지도록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다. 이제 ‘시험과 점수의 주술’에서 풀려나야 한다. 실패도 미덕이 되고, 그 미덕을 통하여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는 구태의연한 고정관념에 갖혀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 하나. 내가 나이 서른에 프랑스로 유학 가서 낯선 교육환경에 그나마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담론을 즐긴 덕분’이다.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없어도 언어라는 도구를 빌어 내가 구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나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말하고자 애썼다. 어느 날 프랑스 친구가 말했다. “너는 다른 아시아학생들과는 다르다”고. 그 이유인즉슨 “대부분의 아시아학생들은 자신의 의견 밝히기를 꺼려하고 묵묵히 듣고 있는데, 너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드러내는 것이 다르다”고 평가했다. 


프랑스인들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식사 초대를 받으면 가장 곤혹스러운 것이 끊임없이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사하랴, 대화하랴 신경쓰다보면, 정작 음식이 무슨 맛인지도 모른다. 프랑스인들의 대화 범위는 전문지식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폭넓고 다양하다. 입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도 한계가 있지 몇 시간 동안 계속되는 식사 시간 내내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우리 젊은이들을 국제무대에 진출시키고자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능숙한 대화자가 되도록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 대화에 낄 수 없다면, 학문은 물론 비즈니스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침묵은 금, 웅변은 은”이라는 전근대적인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웅변은 금, 침묵은 은”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빗장을 열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에 이중삼중의 빗장을 채우고 있다. 타인에 대한 믿음과 호기심이 없으니 상대를 만나면 잔뜩 긴장하고 경계한다. 상대가 누구든 일단 믿어야 한다. 만나서 대화해보아야 상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대화해보기도 전에 불신하고 긴장하며 경계한다면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대에게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하고, 그의 대답을 듣다보면 배울 점 또한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자신보다 연장자를 만나면 마음의 빗장을 꽁꽁 닫아건다. 대화가 경직되고 겉돌다보니 단 몇 분을 넘기지 못하고 대화가 중단되고 만다. 이러한 인간관계와 사회분위기는 결국 서로에게 크나큰 손실이다. 서로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혜를 주고받음으로써 우리는 훨씬 성숙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 수단이 대화와 소통이다. 


오늘도 제주도에는 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만일 제주도 돌담에 구멍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돌담이 구멍으로 통해 바람을 가로막기보다 틔워주고, 맞서 싸우기보다 지켜보고 있기에 그 돌담은 무너지지 않는다. 해법은 바람길. 쑹 쑹 구멍 뚫린 돌로 얼기설기 담을 쌓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마음을 가로지른 빗장을 과감히 풀어헤쳐야 한다. 대화와 소통의 바람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살맛나는 사회가 된다. 오늘도 제주도에는 웅 웅 세찬 바람 불지만 돌담에 구멍이 있기에 그 구멍 속 길을 따라 바람은 절로 사라져간다. 


어줍잖게 시를 쓰고 모아 벌써 여러 권 시집을 냈다. 앞뒤가 꽉 막혀있는 현실에 제주도의 돌담에 쑹 쑹 구멍 뚫린 바람길을 내고 싶다. 우리에게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그런 염원을 담아 몇 해 전 다섯 번째로 낸 시집의 제목을 <바람구멍>으로 삼았다. 새해에는 대화와 소통이 꽉 막힌 우리 사회에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람길이 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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