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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울 령 Feb 17. 2022

‘필요한’ 갈라치기와 ‘나쁜’ 갈라치기

얼마 전 이런 기사를 봤다. 중국의 문화공정을 비판하면서 혐중 정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건 모순이라는 내용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외국에 나와 어렵게 경제적 삶을 일궈가는 중국인 노동자를 똑같이 본 것이다. 아마 시민이 이 둘의 차이도 구분 못할거라고 보고 낸 기사일 테다. 과연 그럴까?


진영 싸움인 정치에서 갈라치기는 필연이다. 내 이익과 저들의 이익이 다른 부분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를 조정하는 게 정치이기 때문이다. 힘이 비등비등한 두 세력 끼리 싸우면 다른 세력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과거에는 외국 왕가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국민 투표로 결정이 나기 때문에 피지배계층인 일반인의 지지까지 더해져야 한다. 그래서 여태껏 정치 지도자들은 무고한 시민들 간에 갈라치기를 해왔다. 대부분 국가들의 역사적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남북 분단, 영호남 지역주의, 대졸과 고졸,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치기 당하며 서로를 혐오하고 미워했다.


내가 비판하는 갈라치기는 이 부분이다. '시민 갈라치기'는 일반인 삶에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심지어 사회 갈등 유발의 원인이 되는 정치 구태이다. 현재 이 구태는 남녀, 세대, 혐중으로 모습만 바뀐 채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이러한 갈라치기를 주장하는 정치 세력이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는다면 앞으로 여성, 노인, 외국인 등이 지금보다 더 혹독한 사회적 지옥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건 안 봐도 비디오이다.


그렇다고 기득권을 갈라치기하는 정치가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적절한 기득권 갈라치기'는 거대한 권력을 나누고 서로 견제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을 수 있다. '기득권 갈라치기'는 결국 기득권 간 이익 다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기득권 갈라치기가 불편한 사람은 자신의 권력 파이가 줄어드는 게 불편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미숙하더라도 이익을 받을 일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갈라치기 하는 것보단 백번 낫다고 생각한다.


이때 오해하는 게 있는데, 중국 공산당의 문화공정을 비판하는 식의 대응은 갈라치기가 아니다. 명백히 잘못된 행태에 대한 정당한 화내기이다. 또한 의사와 간호사처럼 힘의 균형이 뚜렷한 관계에서 힘이 약한 쪽 편을 드는 것은 약자의 이익 대변이지 갈라치기가 아니다. 마땅히 화를 내야할 때, 정당한 주장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할 때, 정치를 해야할 때를 혼란스럽게 궤변을 늘어놓는 건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상대가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게 될 때 비로소 상대를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라치기 해야 할 상황이 있고 아닌 상황이 있다. 화를 내야할 때가 있고 그럴 수 없는 때가 있다. 이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인간 삶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충실한 다수의 침묵하는 시민들은 이처럼 당연한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권력자가 여기에 휘둘리냐 아니냐, 직접 선택을 주도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지켜볼 뿐이다. 여태껏 보수 정당은 선택지를 만들어 선택을 주도해왔고 진보 정당은 휘둘리냐 아니냐의 문제에 처해 있었다. 이번 대선이 박빙인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진보 정당도 이번엔 스스로 선택지를 제시하려는 위치에 서려 하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 갈리치기'의 의도는 단순히 선거 당선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 갈등 요소를 야기해 그보다 앞서 존재하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 현안들을 해결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다고 본다. 예를 들면, 케인스가 경제 살리려면 땅을 갈아 엎고 다시 메워야 한다는 주장과 결이 같은 것이다. 기존 갈등을 더 큰 갈등을 만들어 덮는 것이니까. 대표적으로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시민 갈라치기의 본질을 아주 잘 드러낸다.


그래서 '시민 갈리치기'를 하지 않겠다는 정치인은 직접 문제 해결은 못할 수 있더라도 해결의 길을 막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으로 본다.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향상성'이며, 이 향상성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이니까. 우리의 문제는 정치인이 아닌 우리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 비록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불완전하더라도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고, 해결의 장을 열어주겠다는 지도자라면, 시민도 각계 지배계층도 내일의 희망을 느끼고 지지할 거라 본다.


문제로 인해 이득을 보는,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들만이 적극적으로 국민의 이름을 내걸고 반대 의사를 내비칠 것이다. 안타깝게도 부정 편향적이고 사건 중심적인 뉴스 생산 구조에 더 많이 포착되는 건 이들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종종 가치 판단에 혼란을 겪을 테다. 하지만 정치인이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해 다수의 침묵하는 시민들의 바람을 온전히 품어 안는다면, 그리고 여기에 시민들이 표로 응답한다면 우리 사회의 수많은 현실이란 명목의 부당한 관례들이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관례들이 조금씩 깨지면서 우리 사회도 변화한 현실에 맞춰 달라지지 않을까?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하지만 앞으로 재편되어야 할 시장 경제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정치인은 이제 엘리트 집단만이 아닌 시민들도 함께 설득하고 끌고 갈 능력을 지녀야 하고, 시민들도 자신의 주인 의식을 보여줘야 한다고 본다.


기존의 구태적 방식을 과감히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선택지를 직접 제시하며, 영리하게 이를 설득하고, 과정의 불확정성으로 인한 불안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배짱을 지닌 정치인만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변혁의 시대에 시민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시민 갈리치기'의 구태를 반복하지 않는 정치인이 그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잠재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벤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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