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는, 글쓰기 싫은 사람이 굳이 억지로 글을 쓰려고 하는 이유
1. 사실은 글쓰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정확히는 나를 위한 글쓰기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부탁한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내 프레젠테이션을 만드는 건 그렇게 내키지 않지만, 친구가 부탁한 프레젠테이션은 눈 비비면서도 만들어준다. 내 자소서를 쓰려고 하면 한 줄 쓰느라 한나절 가지만, 아는 동생이 부탁한 커버 레터는 일필휘지로 써내려간다. 커버 레터를 부탁한 그 동생이 취업을 하고 기획서 초안을 부탁하는 걸 보니, 글솜씨는 나쁘지 않은가 보다.
2. 그러다보니 내 글의 중심은 내가 아닌 '상대방' 이 되기 일쑤였다. 나 자신의 생각을 응축한 글 대신, 상대방의 기준에 부합하는 글을 쓰려고 애썼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면서도 상대방의 눈치를 직간접적으로 보기 일쑤였다. 상대방이 기뻐하면 내 글은 가치가 있는 글이지만, 상대방이 불만족스러워하면 내 글은 별로인 글이 된다. 수많은 글을 창작해왔지만, 한 번도 내가 내 글을 오롯이 평가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3. 왜 나를 위한 글보다 남을 위한 글을 쓰는 걸 더 좋아하게 되었을까? 여러 가설이 있지만, 지금 떠오르는 두 가지 이유는 바로 '즉각적 보상' 과 '책임감' 이다. 남을 위한 글을 써주면 정성적이던 정량적이던 즉각적으로 보상이 들어온다. 글에 대한 칭찬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했던 적도 많고, 글 잘 써서 지원금을 받고 해외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다. 하지만, 나를 위해 쓰는 글에는 그런 즉각적 보상이 들어오지 않는다. 글쓰기를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배운 교훈을 단순히 풀어내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즉, 글쓰기를 통해 내가 무언가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없다고 느꼈다. 게다가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쓰는 글에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가성비가 안 맞는다고 해야 하나. 내가 누군가를 위해 2시간을 들여 글을 써주면 수많은 인정과 선물을 받을 수도 있는데, 나를 위한 글에 2시간을 쓴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많은 걸 얻을 수 있을까? 물론 뉴스레터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수많은 작가 (Not Boring) 들도 있지만, 그들이 글에 투자한 몇 천 시간을 일이나 운동에 투자한다면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4. 나를 위한 글과 남을 위해 쓰는 글에 대해 갖는 책임감도 다르다. 남을 위한 글에는 막대한 책임감과 데드라인이 따라 붙는다. 내가 조금이라도 부족한 글을 쓰면 나에게 글을 부탁한 사람은 시험이나 면접에 떨어질 수도 있다. 내가 표현을 더 세밀하게 다듬지 않으면, 이 편지를 받은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평생 수정하고 다듬을 순 없다. 제출일 혹은 기념일이라는 명확한 제한 시간이 존재하고, 그 이전까지 글을 어떻게든 완성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탈고하면서 아쉬운 점이 한가득인 경우도 많지만, 데드라인으로 인해 글을 넘길 수 밖에 없었던 경우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에는 그 정도의 책임감을 갖지 못했다. 쓸 데 없는 완벽주의도 한 몫했다. 내 글을 쓰는 데도 누군가의 신경을 정말 많이 썼다. 사람들이 많이 볼 것 같은 주제를 가져오느라 지쳐서 글을 포기한 적도 많았다. 글을 완성했지만 데드라인을 세워두지 않았기에 수정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 밤을 샌 적도 있다. 그렇게 하나 완성하면 방전이었다. 도저히 다음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5. 시도를 안해본 건 아니다. 독서 모임에도 참가해서 시간 제한을 두고 독후감을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매 글마다 멤버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어느새 내 독후감은 또 다시 내 방식대로 변질되어 갔다. 내가 진정으로 책을 읽으며 느낀 점을 쓰는 대신, 멤버들의 스타일을 분석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게 글을 쓰고, 수정하고, 편집했다. 내가 느낀 통찰 대신 허울 뿐인 껍데기로 글을 채우려니, 진도는 더럽게 안 나갔고 비슷한 성격의 글을 쓴 다른 사람들의 스타일을 답습할 뿐이었다. 그래도 글은 잘 나왔다. 왜냐고? 다른 사람들의 통찰을 어떻게든 짜집기하고 정해진 독자에 맞게 썼으니까. 칭찬받기 위한 글을 썼으니까. 12주 동안 12편의 글을 쓰고 다시 포기했다. (오히려 투박하지만 자신의 스타일에 충실한 사람들이 더 오래 글을 쓰더라. 그 분은 지금 작가로 등단해서 글을 계속 쓰고 있는 걸로 안다.)
6. 그렇게 20년이 넘는 세월을 남을 위한 글만 쓰다가, 우연히 파트 타임으로 동영상 번역 업무를 맡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은 해외의 유명 비즈니스 관련 영상을 번역 후 정리해서 올리는 유튜브 채널인데, 가볍게 시작한 업무였지만 업무 강도도 그렇고 난이도도 그렇고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으레 해오던 번역 업무처럼 첫 영상을 번역했는데, 엄청 까였다. 문맥도 맞지 않고, 직역투에, 말하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피드백이 명치에 꽂혔다.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문 텍스트의 메시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그대로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게 번역의 목적이 아닌가? 모르는 단어 하나하나 다 찾아가며 문맥을 고려해서 번역을 했는데, 왜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당해야 하는 거지? 심지어 5분짜리 영상 하나 번역하느라 3시간을 썼다. 최저 시급도 안 되는 돈을 받으면서.
7. 그렇게 작업한 3개의 영상이 연달아 피드백 찜질을 당하고, 일을 맡기신 분과 처음 1시간 정도 독대를 했다. 솔직히 그 곳에서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하곤 도저히 맞지 않는 일 같았다. 여유 시간은 커녕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직역을 했는데, 번역을 제대로 못했다는 얘기만 들었다. 문맥을 살리라는 말이 대체 무슨 말인가? 최대한 기분 안 상하게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분이 이렇게 말했다.
"현석씨는 지금 하시는 일의 목적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속으로는 "유튜브 한 구석에 묻혀있는 조회수 낮은 비즈니스 영상 번역하는 것" 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모른다고 말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가히 걸작이었다.
"이 채널의 목적, 그리고 현석씨의 일의 목적은 장벽을 없애는 거에요."
8. 유튜브에는 미처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통찰력 있는 영상이 존재한다. 지금 주목받고 있는 CEO들이 회사 설립 초기에 한 인터뷰 영상도 있고, 이름만 들으면 아는 투자자들이 깨달은 교훈을 담은 클립도 더러 있다. 문제는 언어의 장벽이다. 영상에 나오는 연사의 90% 이상은 영어를 사용한다. 그것도 굉장히 고급 영어를 사용한다. 통찰을 얻기는 커녕 표현 하나 따라가기도 벅차다. 그나마 있는 번역 영상도 그 퀄리티가 너무 낮았다. 한국인들이 읽는 데도 이해가 가지 않는 한국어 문장이 속출했다. 이 유튜브 채널은 언어의 장벽이라는 Pain Point를 해결하기 위해 '번역' 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번역' 영상만 담으려고 했던 채널이 아니라.
9. 그제서야 이해가 되지 않았던 피드백들이 한 방에 이해되기 시작했다. 원문의 표현을 살리는 건 중요하지 않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핵심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표현이 생략되거나 문장 구성이 바뀌어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핵심 목적은 이 영상의 핵심 메시지를 시청자에게 최대한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니까. 1시간의 독대였지만, 내 안에 많은 것이 깨어진 기분이 들었다. 하고자 하는 일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 본질을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10. 그러면, 글의 본질은 무엇인가? 글의 제 1목적은 '내 생각'과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공유하는 것이다. 즉, 글을 쓸 때는 상대방 이전에 내 생각과 메시지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내 생각과 메시지가 없는 글은 본질적인 '글' 이 아니다. 다른 본질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글' 일 뿐이다.
11. 나는 이제껏 상대방을 위한 글만을 써왔고, 그 글들은 본질적인 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글을 쓰는 행위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영상을 번역하면서 얻은 수많은 통찰을 통해 나의 메시지를 가다듬고, 가감없이 그 메시지를 글을 통해 되새기고 성찰한다. 독자가 없을 수도 있다. 즉각적 보상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예전같이 내 메시지보다 상대방이 우선하는 글을 쓰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내 자신에 대해 더 솔직해지고 싶다. 다른 사람의 눈치와 피드백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메시지들을 담은 글을 써보고 싶다. 그렇게 쓴 글들이 인정받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몇 달, 몇 년 뒤의 나를 평가하는 시금석으로 삼으려고 한다. 정말 나는 글쓰기의 본질을 지켰나? 여기서는 무엇을 깨달았나? 그 깨달은 것을 정말로 내 인생에 적용했는가? 본질은 단순하다. 단순하게 시작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