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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y 01. 2024

진상(?) 소비자 탄생 과정

일상기록

참으로 지난한 한달 남짓이었다. 내가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돌려받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다.


발단은 지난 3월 초, 집 근처 헬스장에 회원 등록을 하면서부터였다. 겨울 동안 트레킹을 쉬어서 몸이 약해지기도 했고, 작년 말에 약 3년간 먹어왔던 우울증 약도 그만 먹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운동을 좀 제대로 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편과 함께 집 근처에 있는 요가센터, 얼마 전부터 유행 중인 점핑댄스장, 그리고 헬스장까지 알아보다가 결국 한 헬스장에 장기 회원으로 등록했다. 12개월 등록 시 1개월을 더 이용하게 해 주고, 무료 피티 강습도 매월 2회 받게 해 주는 등의 조건이었다. 물론 무료 피티는 정식으로 피티 강습을 받게 하기 위한 미끼여서 나는 운동 할거면 제대로 배워보자는 마음에, 그리고 담당 트레이너의 집요한 설득에 거금을 주고 피티 12회 수강권도 결제했다.


운동을 너무 싫어해서 운동 습관이 안 잡혀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말자는 굳은 각오를 하고 회원권을 끊은 날부터 시작해서 주 3회 꼬박꼬박 헬스장에 나갔다. 그런데 2주 뒤, 헬스장에서 문자를 받았다. 대규모 리모델링 공사를 하게 되어 헬스장을 40일 이상 닫는다며, 그 기간동안 운동을 하고 싶으면 경기도 의정부에 있는 지점을 이용하라는 거였다.


황당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정도의 대규모 공사라면 내가 계약할 당시 관계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는데 그걸 숨기고서 장기계약을 하고 고가의 피티를 수강하게 한 것이 말할 수 없이 괘씸했고, 무엇보다 이들이 공사기간 동안 이용하라고 한 지점은 집과 회사에서 멀어서 갈 수가 없었다. 나는 이곳을 더이상 이용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일단 담당 트레이너에게 항의표시와 함께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문자를 보냈고, 바로 다음날 헬스장을 방문했다. 관련 법령인 체육시설 이용에 관한 법률도 찾아서 출력해 갔다.


담당 트레이너는 나를 한번 더 설득해 보려 했으나 화가 잔뜩 난 내 귀에 그의 말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자 매니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위약금과 계약 해지 시 지급하게 되어 있는 무료 피티 2회 비용을 공제하고 환불하겠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폭발했다. 위약금이라니, 자기네들 귀책사유로 헬스장 이용을 못하여 해지하는 건데 이건 무슨 멍멍이 풀뜯어먹는 소리냔 말이다. 아니, 관련 법률에 의하면 오히려 헬스장 측에서 나에게 위약금을 물어야 할 판인데.


그러나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짐작컨대 이런 일에는 아주 이골이 난 사람같았다. 그는 그런 법률 가져와봤자 자기네한테는 아무 소용 없다며 조롱조로 말했다. 소비자원에 민원을 넣겠다는 말에도 알아서 하라, 그곳의 의견은 법적 구속력이 없으니 우리는 따를 의무가 없다며 배째라는 식이었다. 나는 책상에 놓인 볼펜이며 필통 따위를 그에게 던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위약금 자체는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내 사정으로 해지하는 것도 아닌데 그 금액을 못 받는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다음 날 당장 소비자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소비자원은 바로 민원접수를 할 수 없고, 일단 산하 시민단체에 사건을 접수하여 해결해 보도록 한 뒤 해결이 안되면 정식 접수를 하게 하는 절차였다. 나는 절차대로 한 단체를 골라서 민원 접수를 하였고, 당연히 헬스장에서는 나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통보를 받은 후 나는 바로 소비자원에 정식 사건 접수를 하였다.


관련 증거들을 첨부하여 사건 접수를 하니 사건이 직원에게 배정되었다고 안내문자가 왔고 이어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내가 주장한 대로 이건 헬스장 측에서 나에게 위약금을 지불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하였다. 헬스장 측의 배째라 식 대응에 분노했던 나는 누군가 내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지않은 위안을 얻었다. 사실 위약금을 그쪽에서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고, 다만 내가 위약금을 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은 바로잡고 싶었던 거였다.


사건 처리까지는 한 달 정도가 걸린다고 했고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드디어 소비자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헬스장 측에서 위약금을 돌려준다는 거였다. 나는 그들이 공제한 무료피티 2회 비용 환불도 같이 요구했으나 그것까지 그들이 들어줄 것 같지는 않았고, 위약금을 돌려받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소비자원 측의 중재에 응하기로 했다. 환불 일자는 계약서에 적힌대로 4월 말일이었다.


그날이 어제였다. 나는 일하면서 틈틈이 은행 앱에서 입금 알림이 오는지 확인했으나 앱은 조용하기만 했다. 정규 근무시간이 지난 저녁 6시 반쯤, 나는 매니저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입금이 안되느냐고. 그는 오늘중 처리될 거라고 짧게 답했다. 오늘 몇시쯤이냐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황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도대체 이 인간들은 나를 왜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인가. 환불 신청 후 환급일까지 한 달을 넘게 기다렸는데 이건 또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인가. 이거 말고도 여러가지 사건사고로 머리가 터질 것 같던 나는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운다고 돈이 들어올 것도 아니었다. 엉엉 울면 누군가 입에 사탕을 물려주는 건 어릴때나 있는 일인 것이다. 나는 정신을 부여잡고 다시 따졌다. 그건 니네 사정 아니냐고. 내가 한 달을 넘게 기다렸는데 이게 무슨 짓이냐고.


얼마간 답이 없더니 이윽고 기다리던 입금 알림이 떴다. 아마 내가 소비자원에 민원까지 넣은 사람이기에 빨리 치워(?)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런데 입금된 건 헬스장 이용금액 뿐이었다. 피티 비용은? 나는 다시 따져 물어야 했다.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연락받은 바가 없다며 알아보겠다고 했고, 나는 입금 내역과 당시 트레이너와의 대화내용 등을 캡쳐해서 보내주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피티 비용까지 환불받을 수 있었다.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다. 어차피 돌려받을 금액인데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가 싶었다. 내가 소비자원에 민원을 넣지 않았다면 위약금은 그대로 떼였을 것이고, 5월 3일에 환불해 준다는 말에 알았어요~ 했다면 어쩌면 그 돈은 5월 3일에도 안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당연한 권리를 규정에 따라 행사한 것이지만, 어쩌면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그냥 '곱게 말로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진상 소비자나 진상 민원인이 늘어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하여 공무원에게 폭력까지 휘두르는 악성 민원인을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더해서, 소비자원 담당자가 사건 접수 초기에 나의 억울한 마음을 잘 짚어주고 공감해 주어 많이 위로가 되었고 그게 감사해서 소비자원에 직원 칭찬 글도 남겼다. 언제든 민원을 접하고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업무처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느껴보는 기회도 되었다. 그게 이 한달 남짓 기간동안 얻은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앞으로 내가 사설 헬스장을 이용하면 성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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