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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y 08. 2024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 창비)

독서노트_43

아이가 감당해야 할 삶의 ’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안희연)리뷰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사람의 생애에도 계절이 있다. 눈부신 봄이 미소를 보내주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얼음이 꽝꽝 얼고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때도 있다. 2024년 5월, 달력은 봄을 말하고 있지만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로 시달리는 나에게 올봄은 겨울이다.


나이가 들면서 실감하게 되는 것은 기초대사랑 감소에 따라 늘어나는 체중도, 염색을 하여 감추어야 하는 흰머리도, 주름개선기능이 있다는 화장품을 써 가며 숨겨야 하는 주름살도 아니다. 바로 무슨 일이 생겨도 ‘물어볼 곳이 없다’라는 사실이다. 한 해 한 해 늘어나는 나이에 비례하여 결정해야 하는 일들의 무게는 무거워져만 가는데 나이가 들었으니까, 아는 것이 많아졌으니까, 경험이 많으니까 등의 이유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답답한 것을 토로할 수 있는 곳은 줄어들어만 가는 것이다. 그것은 ‘엄마의 치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내 삶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가’와 같은 다소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던 중 안희연 시인의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만나게 되었다. 시인은 ‘여름’과 ‘언덕’이라는, 따로 떼어놓고 보면 풋풋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단어들을 이어붙여 ‘여름 언덕’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만든 후, 우리가 그 새로운 단어에서 상상할 수 있는 진부한 이미지와 한계들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만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에서 나는 근사한 외출복을 입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화장실에 가서 큰 볼일을 본 후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상황을 연상했고 마치 그것이 꼭 내 모습같다는 생각을 했다. “계속 내리막,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오는 밤”처럼, ‘여름 언덕’은“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뒤에 따라오는 삶의 어둡고 냉엄한 측면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일 때, 물웅덩이 가운데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나는 어째야 하나. 어쩌면 시인 역시 이러한 고민에 빠졌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달의 아이’가 되어 ‘할아버지’를 찾는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색색의 털실 뭉치, 그중 하나를 골라 풀어내”(「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고, “실수로 구슬 하나를 떨어뜨린 날 할아버지께 호되게 혼이”(「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나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할아버지, 영원은 얼마나 긴 시간이에요?”(「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라고 묻기도 한다. ‘나’의 “그들은 어쩌다 인간으로 태어났을까요?”(「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라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나도 인간의 모든 비극을 예측할 순 없었노라”고 답하고, 할아버지의 말에 따라 노래를 찾으러 나섰다가 결국 “벌거숭이의 노래”(「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를 가져오고 만다.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를 시인이 한두 번도 아닌, 무려 네 번이나 쓴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까. ‘아이’가 되면 일단 편해진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큰 비난을 받지 않으며, 책임이 가벼워지고 무엇보다 ‘어른’에게 어려운 문제의 답을 구할 수 있다. 나날이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열여덟 살, 열여섯 살이 된 나의 두 아들을 내가 ‘아가’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어쩌면 시인 역시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의 답을 얻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달의 아이’였던 시절을 네 번이나 불러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하여 ‘할아버지’가 ‘나’에게 속 시원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불분명하다. 그런 ‘할아버지’가 주는, 알 듯 모를 듯한 답을 안고 ‘나’는 ‘그’와 함께 “물어도 묘사할 수 없는” 호수를 찾아가서 “반딧불이의 숲은 어땠어?”, “네 최초의 기억은 뭐야?”(「알라메다」)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반려조」)함을 깨닫고, “불타는 공이 날아왔다는 것은 불에 탈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캐치볼」) 사실에 가 닿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은 「몫」에서 명확해지고 구체화되는데, “이제는 호들갑 떨지 않는다, 몫이었겠지”라고 생각함과 함께 “몫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덜 미워하게 될는지도”라는 결론에 도달함을 볼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어’라고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 되뇌이지만, 그렇게 중얼거림과 동시에 어깨에 걸머메고 있는 거대한 삶의 바윗돌을 다시 고쳐 매어야 하는 삶의 굴레 속에서 나는 여전히 ‘아이’의 마음으로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찾아 두리번거리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내 ‘몫’임을 모르지 않으며, “한없이 길어진 목으로 삶이 되지 못한 단 하나의 영원을 생각”하며 “손톱 밑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내고 싶지 않”(「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늘 세심하고 전문적인 평가를 해주시는 세종사이버대학교 김상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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