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향인 May 12. 2024

편식 대마왕

일상기록

입원하여 정밀검사를 한 결과, 건명이는 예상했던 대로의 진단을 받았고 거기에 다른 진단이 추가되었다. '빈혈'이 주 진단명과 함께 찍혀 있었는데, 피검사 결과 철분 말고도 칼슘,  마그네슘, 비타민 디 수치가 평균보다 많이 낮아 보조제를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꽤 많은 약이 건명이에게 처방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빈혈 진단에 놀라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건명이는 어려서부터 편식이 아주 아주 심한 아이였고, 지금도 먹는 음식 가짓수는 열 가지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다 입가에 가져가지조차 않으며, 억지로 먹일라치면 구역질부터 한다. 그런 녀석이니 영양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따라왔을 것이다.


모유나 초기 이유식을 먹일 때에는 아이의 식성을 파악할 수 없다. 사실 건명이는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젖병에다 분유를 먹이는 바람에 한동안 모유를 거부해서(아기에게는 젖병이 모유보다 훨씬 먹는데 힘이 덜 든다) 나는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모유수유를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다 생후 5~6개월 사이, 초기 이유식을 먹고 이어 다양한 형태의 이유식을 먹이게 되면서 나는 알았다. 녀석의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는 걸.

조리원에서 모유수유 하려고 방에 데려왔건만 모유 거부하고 울기만 하다가 잠든 강건명 군

그때 나는 비슷한 월령의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 몇을 알고 있었다. 엄마들끼리는 가끔 아이를 데리고 모여서 당시 유행하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곤 했다. 가면 아기들은 스프나 부드러운 빵 등 먹을만한 것을 먹었고 엄마들은 아기들을 유아 의자에 앉히고서 같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나만 빼고.


건명이는 패밀리레스토랑에 있는 모든 음식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스프, 빵, 면 등 모든 음식을 다 거부했고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건명이의 관심사는 오직 새로운 공간(패밀리레스토랑) 탐색이었다. 신체발달은 또 빨라서 녀석은 또래보다 빨리 걷고 뛰었고, 따라서 잠시도 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혼자 돌아다니게 둘 수 없어 식당에 있는 내내 물조차 마실 틈 없이 녀석을 쫓아다녀야 했다. 모임이 끝나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지만 또 돈은 돈대로 내야 했다. 그런 모임이 몇 번 반복된 후, 나는 엄마들 모임에 참석하는 걸 그만두었다. 아이랑 나랑 음식 변변히 먹고 오는 것도 아닌데 돈만 쓰고 오는 것이 싫었고, 낭비라고 생각되었다.


집에서라고 애가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아니었다. 건명이는 과일도, 요거트도, 우유도, 채소도 먹지 않았다. 단유를 할 때도 모유 외에는 그 어떤 분유도 거부했다. 아이를 한끼 굶기면 된다기에 정말 독한 맘을 먹고 한 끼를 안 먹인 후 분유를 주면 녀석은 굶주림과 목마름을 해소할 정도, 그러니까 딱 세 모금 정도만 분유를 빨고서 다시 밀어냈다. 그렇다고 매 끼니 아이를 굶길수도 없었다. 간식으로 아이들이 고구마를 잘 먹는다기에 삶아서 새끼 손톱만큼 입에 넣어주니 바로 구역질을 했다. 자기가 먹기로 한 몇 가지 음식 외에는 다 그런 식이었다.

건명군이 초1때 쓴 일기. 그놈의 김치에는 원수가 졌는지 지금도 먹지 않는다

안먹는 음식을 먹이려 하면 구역질부터 하는 애를 패서 억지로 먹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아이에게 이런저런 영양제를 챙겨 먹였다. 물론 빈혈은 예상하지 못해 철분제는 먹이지 않았지만 비타민이나 각종 미네랄 종류는 꾸준히 먹이고 있었는데 결과가 이러하니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것 같아 무척이나 씁쓸하다. 병원에서도 영양제를 먹이고 있었냐며 놀랐는데.


의사는 필수 영양소는 음식으로 보충하는 게 제일 좋다며, 이를테면 마그네슘은 견과류..까지 이야기하다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 말았다. 아이가 그런 걸 안먹나요? 의사는 물었고 나는 얘가 먹는 열 가지 정도(밥, 우동이나 라면 등 면류, 고기, 생선, 미역국의 미역, 두부, 콩나물, 팽이버섯, 상추, 김) 빼고는 입에도 안 댄다고 고자질했다. 모르는 척 의사를 외면하고 누워있는 건명이에게 의사는 골고루 잘 먹어야지..라는 충고를 하였고 그 말은 연기처럼 병실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사실 나도 음식을 좀 가리는 편이긴 하다. 나는 먹어본 음식만 먹는 편이고(대신 한 가지 음식을 한달 내내 먹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안 먹어본 음식은 '혹시 맛이 없을까봐' 아예 입에 대지 않는다. 멍게, 해삼, 개불, 곱창 등 '요상하게' 생긴 음식은 생김새부터 나한테 탈락이다. 그래도 나는 딸기를 아예 안 먹거나, 고구마를 먹으면 구역질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 모든 음식, 일반인이 먹는 무수한 음식을 다 거부하는 이 녀석은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지독한 편식을 극복하고 나름 애를 건강하게 잘 키웠다고 생각했건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이 지난 17년을 몹시 허탈하게 한다. 나는 이제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나. 누가 길을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건명이의 첫 입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